며느리들
명절 전날.
오전 10시 전후 초인종이 울린다. 문을 열면 작은 동서가 명랑하게 '형님 ~ ' 하며 들어온다. 막내 동서보다 일찍 도착한 것에 안심하는 눈치다. 서방님 건강은 어떤지 아이들은 잘 있는지 잠시 집안의 안부를 묻는다. 동서는 할 일을 찾느라 묻는 말에는 건성건성 대답한다. 차 한잔하면서도 한 손으로는 나물이라도 다듬으려 분주하다. 이내 막내동서가 도착한다. 우리 세명의 며느리는 결혼해서 지금까지 제사 준비를 함께했다. 큰 며느리인 내가 장을 보고 작은며느리들이 명절 전날 우리 집에 와서 함께 음식을 만든다.
명절이 다가오면 물론 큰며느리인 내가 제일 바쁘다. 제사음식은 종류가 다양하다. 장을 한꺼번에 볼 수가 없다. 기름이나 간장 밀가루 전분가루와 같이 음식을 만드는데 기본이 되는 식재료와 마른 북어나 곶감과 같이 미리 장만해도 상하지 않을 물건들은 대형마트에서 미리 사다 놓는다. 나물 종류는 명절에 임박해서 주로 재래시장을 이용한다. 장보기의 하이라이트는 고기종류다. 산적거리 국거리는 질이 좋은 소고기로, 홍해삼에 들어갈 간고기는 소고기와 돼지고기를, 수육거리는 돼지고기로 준비한다. 산적거리 소고기 고르는 것이 어렵다. 많은 양을 하기 때문에 부위에 따라 가격 차이가 많이 난다. 어느 부위로 모양을 어떻게 썰어야 하는지 상황에 따라 결정한다. 수육용 돼지고기는 통삼겹살로 준비한다. 양도 많고 요구사항도 많기 때문에 사람들이 적은 시간을 택해서 단골 정육점을 이용한다.
내가 가장 신경을 쓰는 것은 김치다. 차례상에는 배추김치와 나박김치를 올린다. 설에는 배추김치를 김장 때 담아 놓은 것을 사용하지만 추석에는 새로 담는다. 나박김치는 빨리 익혀먹어야 맛이 있기 때문에 명절 가까이 담는다. 제사음식은 메뉴나 양 조리법이 거의 정해져 있다. 오래 함께 일을 하다 보니 처음보다 많이 쉬워졌고 거의 분업화되었다. 작은동서는 나물종류를 막내동서는 홍해삼을 담당한다. 5가지 나물을 가지런히 볶아놓은 모습은 섬세함이 요구된다. 홍해삼은 두부를 오래 치대야 하기 때문에 작은동서의 수고도 만만치 않다.
재료 준비가 거의 끝나가면 점심을 먹는다. 해야 할 많은 일을 남겨놓고 우리가 먹는 점심을 새로 만들 시간이 없다. 오랜만에 일을 하겠다고 온 동서들에게 점심을 소홀이 할 수 없어 처음에는 배달음식을 시켰다. 배달음식이 입맛에 맞지 않기도 하고 배달음식 자체를 꺼리기도 하는 나는 동서들을 데리고 동네 음식점을 찾기도 한다. 일을 하다 나왔기 때문에 빨리 들어가야 한다는 급한 마음과 일 하면서 엉망이 된 꾸미지 않은 모습을 보며 서로 웃으며 서둘러 점심을 먹는다.
오후 2시 정도 되면 서울 사는 작은집 동서들이 온다. 작은집 동서들이 오면 본격적으로 일이 시작된다.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대형 전기 프라이팬을 놓는다. 전은 북어 전과 돼지고기 전을 부친다. 우리는 개성식 제사상을 차리기 때문에 상에 올리지는 않지만 나는 녹두전을 꼭 준비한다. 친정에서 먹던 녹두전을 나는 좋아한다. 하지만 그보다는 며느리들이 전을 부치면서 먹기 위해서다. 전은 부치는 그 자리에서 먹는 것이 최고로 맛이 있는데 원래 제사상에 놓을 음식은 먼저 먹지 않는다는 법칙이 있다. 녹두전은 제사상에 올리지 않기 때문에 마음 놓고 먹을 수 있다. 일을 하면서 바로 부친 녹두전을 다섯 명의 며느리들이 함께 먹는 맛은 꿀맛이다. 5시가 넘으면 일은 서서히 끝이 난다. 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동서들에게 저녁상에 놓으라고 녹두전을 싸 주면 모두가 좋아한다.
명절 당일에 참석하는 것도 힘든 시대에 전날 다섯 며느리들이 모여 일을 할 수 있도록 마음이 맞고 여건이 된다는 것은 행운이었다. 며느리들은 일을 하러 올 때 보통 봉투에 돈 20만 원과 앞치마를 준비한다. 돈은 제사비용이고 앞치마는 내가 일을 하러 왔다는 일종의 시그널이다. 남편 집안 제사 음식을 만들기 위해 전날 큰집으로 향하는 며느리들은 각자 자신의 남편에게 당당하다. 시동생들은 아내들이 큰집에 일을 하러 간다니 데려다주고 데리러 오기도 하고 동서들이 우리 집에서 일을 하는 동안 아이들을 보고 집안일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
일 년에 두 번 만나는 며느리들은 만나자마자 이야기 꽃을 피운다. 요즘 하는 일은 무엇인지, 무슨 운동을 하는지, 남편이 하는 일은 잘 되고 있는지, 자식들 중 누구는 무엇을 잘하고 누구는 무슨 과가 맞는지 할 이야기가 끊이지 않는다. 요즘 주부들이 보통 몇 개씩 자유롭게 모임을 가지지만 시댁 며느리모임은 서열이 명확하고 한 성씨를 가진 남편이라는 동질감으로 그들만의 편안함이 있다. 나는 동서들 사는 이야기 듣는 것을 좋아한다. 강남 사는 작은집 동서들의 강남 아줌마들의 사는 이야기, 딸만 있는 내가 아들 가진 동서의 아들 키우는 이야기를 어디 가서 듣겠는가?
분가하는 날 시어머님께서는 제사에 필요한 일체의 도구(제기, 상, 위패..)를 나에게 주셨다. 그것은 이제부터 제사는 큰며느리인 내가 책임 지라는 무언의 말씀이셨다. 나는 제사라는 형식을 두고 ‘지낼 것인지 말 것인지’ ‘어떻게 지낼 것인지’를 왈가왈부하고 싶지는 않았고 그럴 입장도 아니었다. 언감생심 분가 자체가 죄인인양 아무 말하지 못하는 마당이었다. 처음부터 결정되는 대로 따르겠다는 마음이었기 때문에 순순히 받아들였다.
“그래, 제사는 지내야지~~”
제사라는 제도는 혈연을 기본으로 하는 공동체에서 행하는 제도다. 인간은 원시시대부터 가족을 중심으로 생활해 왔다. 시대마다 지역마다 종교에 따라 그 형식이 다르기는 하지만 어느 시대 어느 지역에서도 자신의 조상을 모시는 행위는 인간의 출연과 함께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나라가 조선 오백 년 동안 유교의 영향으로 유교식 제사를 지내는 것이 그리 특별한 일은 아니다. 자기가 어떤 조상에서 태어났는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기를 원한다면 자신의 조상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는 있어야 할 것이다.
조선시대의 유교사회였으면 맏며느리가 제사를 모시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조선시대에는 장남에게 쥐어주는 권리가 그만큼 컸다. 재산을 물려받는다든지 있는 집에서는 제사를 모시기 위한 전답을 받기도 하였다. 요즘 세상은 장남이라고 해서 장손이라고 해서 어떠한 법적 권리도 없다. 맏며느리라 해서 의무만을 강조할 수는 없다. 어느 사회나 커다란 원칙은 같다. 그것은 권리와 의무가 함께 가는 것이다. 의무만 있고 권리가 없다면 억울할 것이고 권리만 있고 의무가 없다면 불공정에 대한 공격을 받을 것이다. 문제는 권리와 의무에 대한 해석도 다르다. 사람마다 자신의 입장에서 권리와 의무를 주장하기도 한다. 사회가 혼란한 것은 이러한 체계에 대한 합의가 어렵기 때문이다. 종교적이든 법으로 정하든 어느 사회나 일정한 제도를 갖추고 합의에 이르려고 노력한다.
과거 농경사회에서는 가족이 서로 협력해야 삶의 효율을 극대화할 수 있었다. 형제가 많고 그 형제들이 협력한다는 것은 남보다 잘 살 수 있는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살다 보면 형제간에 협력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형제는 태어나서부터 내 것 네 것에 예민한 경험을 하며 자란다. 형은 항상 양보하는 거 같고 동생은 항상 형만 혜택을 받는 거 같다. 부모들은 이러한 사실을 알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형제간에 우애가 있어야 한다'라고 교육한다.
형제간의 갈등과 화해는 인생에서 아주 중요한 경험이다. 남에게 양보하고 배려하는 것을 생활 속에서 놀이로 배울 수 있는 기회다. 만약 형제가 없이 혼자 자라면 모든 것이 자신의 소유라 편하겠지만 인생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 사회에서 수없이 겪는 많은 일들을 헤쳐나가려면 이렇게 이타적인 심성이 형성되어 있는 사람이 상처를 덜 받는다. 사람들은 이런 품성을 가진 사람에게 '맏며느리감이다' '하늘이 냈다'라는 말을 한다.
현실은 다르다. 현실의 맏며느리는 재력도 필요하고 일이 많아 체력도 필요하다. 나는 다른 며느리들보다 일을 잘하지도 못하고 남들에게 줄 수 있을 만큼 가진 것도 많지 않은데 뭐가 맏며느리감이라는 말인가? 남편이나 나나 젊은 시절 그저 그런 조건을 가지고 똑똑하게 연애를 한 것도 아니고 동네 아줌마의 주선으로 옛날 살던 동네 총각과 결혼했는데 무슨 하늘까지 들먹이겠는가?
하지만 시어머님은 현명하셨다. 장남이라고 해서 어떤 재산을 물려주지 않으셨지만 다른 며느리들에게 형님인 나를 도와줄 것과 제사 때마다 20만 원을 내라고 하셨다. 나는 동서들에게 장은 봐 놓을 테니 명절 전날 우리 집에 모이라고 했다. 작은집 며느리까지 불러 모았다. 이렇게 해서 며느리 다섯이 명절 전날 함께 제사음식을 만들게 되었다. 제사상에 놓을 물건은 제일 좋은 것을 사되 물건값을 깎지 않는다는 원칙이 있다. 이는 제사라는 형식을 통해서 참석한 사람들에게 좋은 것을 잘 먹이고 물건을 파는 사람에게도 이익을 주도록 해야 한다는 의미다. 덕분에 나는 제사장만큼은 편안하게 봤다. 제사상 차리기 위해 받은 돈을 다 쓰는 것이 나의 원칙이었다.
사람은 사람과 어울릴 때 가장 즐겁다. 어떤 공동체라도 사람이 모이면 먹을 것이 있어야 하고 먹을 것을 장만하기 위해 비용과 노력이 필요하다. 그저 인간사의 한 부분이다. 제사라는 형식을 무겁게 생각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자신의 뿌리를 생각하고 형제들과 그 가족이 함께 음식을 만들고 함께 먹고 이야기하고 즐기는 즐거움이었다. 이 뜻을 따라 준 동서들에게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