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음식
설이나 추석은 우리나라 최대의 명절이다. 명절날 아침에는 차례를 지낸다. 명절에 지내는 차례는 조상에게 지내는 제사의 하나다. 신에게 음식을 바치는 제사라는 의식은 인류의 역사와 함께한다. 고대부터 인류는 신에게 제물을 바치며 신에게 의지했다. 고등종교 출현 이후에도 종교에 따라 형식이 달라졌을 뿐이지 신을 의지하는 행위는 같다. 유교가 기본적 국가 이념으로 세워진 조선시대는 조상을 모시는 제사의식이 엄격했다. 근현대를 지나면서 부모에 대한 효사상으로 발전하였다. 명절이면 외지에 나갔던 사람들도 고향을 찾았고 일가친척 동네 사람들과 만나 시간을 보냈다.
사람들이 모이고 즐기는 곳에는 음식을 동반한다. 음식은 시대에 따라, 지방마다, 집안마다 다르다. 경상도나 전라도 남쪽 바닷가 지역에는 해산물이 많고 기호지방에 부잣집 제사상은 육고기가 많다. 부유하고 사람들이 많이 모이면 음식을 많이 준비하고 형편이 어려운 경우는 적게 준비할 수 밖에 없다. 어느 고장에서나 나름의 명절음식이 전해져 내려오기 마련이다. 오랜 시간을 내려온 명절음식은 나름의 특색을 갖춘 종가음식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명절날 먹는 음식은 지역의 특색이 잘 보존되어 있다. 음식을 보고 그 지방의 자연환경이나 사회 인문환경을 유추해 볼 수도 있다.
내가 보기에 명절음식은 몇 가지 특징이 있었다.
하나는 음식의 원형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음식도 하나의 문화이기에 시대에 따라 변한다. 명절음식은 오래 전부터 내려온 조리법이라 주재료를 찌거나 지지거나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화려한 장식이라면 경사도지방 마른 문어를 여러모양으로 오려 상에 올리는 정도였다.
둘째 명절음식에는 여러가지 터부시하는 것이 많았다. 예를 들어 '제사상에 올리는 음식의 재료를 살 때는 제일 좋은 것을 깎지 말고 사라' '음식을 담다 떨어뜨리면 다른 새것으로 올린다' '복숭아는 제상에 올리지 않는다' 등등 과학적인 근거 없이 금기 시 되는 법을 듣고 자랐다.
어릴적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과학적이지 않다고 생각했다. 커서 생각해보니 내 집에 오는 사람들에게 좀 더 좋은 음식을 먹이라는 이야기였고, 파는 사람에게도 이익을 보장해 주라는 의미였다는 생각이 든다. 명절음식에는 고향에서 어머니가 음식을 만들어 놓고 자식을 기다리는 마음, 타인에게 하나라도 더 먹이겠다는 이타심이 담겨져 있다. 이러한 큰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몽매한 보통 사람들에게 다소 교훈적인 목적으로 내려 온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살면서 이민을 간다거나 여행을 한다거나 다른지역을 이해하는 계기는 많은데 결혼도 그 중하나다.
나는 유교적 성격이 강한 집안에서 자랐다. 아버지 고향은 충청도 어머니 고향은 경기도여서 어디에서도 볼 수 있는 중부지방의 일반적인 음식으로 제사상을 차렸다. 소고기와 무를 주재료로 하는 기제사에는 탕국, 두부 전, 녹두전, 동그랑땡이라고 불리는 돈저냐, 소고기 산적, 추석에는 토란국, 설에는 떡국을 먹었다. 결혼 전까지 나는 모두가 우리와 대동소이한 음식을 먹으려니 생각했는데 결혼 후 집집마다 나름의 고향의 음식을 만들어 즐기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시아버님은 개성이 고향이며 한국전쟁 때 피난 오신 피난민이다. 개성에서 시아버님과 동생 두 분만이 피난 오셔서 돌아가실 때까지 개성에 있는 가족을 그리워하셨다. 개성음식은 큰 위안이 되셨다. 설날이면 피난 온 일가친척이 모였다. 아버님에게 명절의 차례상은 곧 고향이었다. 이제 갈 수 없는 고향의 음식을 명절이면 먹을 수 있었다.
결혼 전 제사라는 단어가 죽음 슬픔 조상 핏줄 등등의 다소 우울한 단어였다면 시댁의 제사는 모임 고향음식 가족 그리움 잔치와 같은 다소 밝은 느낌의 단어가 연상되었다. 그것은 개성이라는 지역적인 특징에 있지 않나 생각한다. 내가 이렇게 생각해왔던 것을 박완서의 소설 '미망'을 보면서 너무나 공감하였다.
개성은 송도 혹은 송악으로 불렸으며 고려의 수도였고 항구가 가까이 있어 삼국시대부터 중국은 물론 멀리 아라비아까지 무역을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어디나 그렇듯 상업이 성한 고장은 사람들이 모이고 물자가 풍부하다. 사람들이 많고 물자가 풍부하면 의식주를 기본으로 문화가 발전한다. 송상이라 하여 개성의 상인들은 그들만의 독특한 문화를 갖고 있다.
'미망'은 일제강점기를 거쳐 한국전쟁에 이르기까지 개성의 한 중인 출신 상인 전처만 집안의 일대기를 그린 소설이다. 소설의 주인공은 전처만의 손녀 태임이다. 작가는 태임이를 통해서 숙명적인 굴레 속에서 살고 있는 이 나라의 여자들과는 다르게 사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한다. 소설가 박완서는 개성에서 멀지 않은 개풍군이 고향이다. 소설 속에서 작가는 개성의 문화를 세심하게 표현하고 있다.
소설가 박완서가 쓴 ‘미망’에서 개성음식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송도의 거상 전처만의 집 동해랑에서 전처만의 부인 홍 씨가 준비하는 음식에 대한 이야기다. 홍 씨는 설날이면 전처만이 거느리는 보부상과 소작농과 같은 거상의 집에 기대어 사는 사람들을 먹이기 위한 음식을 장만했다. 그 음식 대접을 받은 사람들은 지체 높은 사람들이 아니다. 오랫동안 전국을 떠돌다 설을 쇠기 위해 고향에 온 보부상이나 동해랑에 기대어 사는 사람들이다.
개성음식은 맛깔스럽다. 음식솜씨가 좋은 집안은 맛도 맛이려니와 깔끔한 모양과 정결하고 아름다운 기물이 잘 어울려 혀뿐 아니라 눈을 즐겁게 했다. 개성의 내노라는 부유한 상인의 집안 명절은 세배 오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일일이 독상을 차려내기로도 유명하였다. 독상이라도 차린 음식의 가짓수가 고루 갖추었을 뿐 아니라 담음새가 보기 좋을 만큼 소담했다. 아무리 양이 커도 한 상을 다 먹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눈요기만 시키고 김서방이 먹다 남은 걸 이서방 상에 다시 놓을 수는 없었다. 독상에 의례 정결한 백지가 온장으로 딸려 나왔고 차인들은 먹다 남은 걸 거기다 싸가지고 가 처자식한테 눈요기 겸 맛을 보였다. 어른을 모시고 있는 차인들은 먼저 싸 놓고 나서 쌀 수 없는 떡국과 나박지 등으로 요기를 했다.
30년 넘게 명절 차례상을 준비했다. 내가 명절에 만들었던 음식이 개성음식이라고는 하지만 개성음식을 대표한다고는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우리집 명절음식은 시어머니께서 큰 할머니 말씀만 듣고 만들었던 음식이 때다. 때문에 솜씨 좋은 어머니에 의해 각색된 것일지도 모른다. 평소 개성음식이 화려하고 고급스럽다고 생각하던 차에 작가 박완서가 쓴 '미망'을 보면서 그 광경이 너무나 이해되어 '아 ~~'하는 감탄사가 나왔다.
'미망'의 주인공 거상 전처만은 송도를 기반으로 성공한 상인이다. 송도 즉 지금의 개성지방은 예로부터 상업이 발달하였다. 전처만은 많은 상인을 거느리고 있다. 전처만에 기대 지방으로 돌면서 장사를 하는 송상들이 설이 되면 고향으로 돌아온다. 고향에서 가족과 명절을 보내면서 전처만의 집에 들를 때 내놓는 음식에 대해 작가는 자세히 묘사하였다. 묘사된 소설 속의 음식을 보며 내가 만들었던 명절음식과 음식문화가 생각났다.
특별한 날이면 해 먹는 갈비, 잡채, 마른 북어를 잘게 뜯어 고춧가루 간장 설탕으로 무치는 삼색북어채 등등 한국음식과 이에 더해져 명절음식으로 설에는 보쌈김치 조랭이 떡국과 개성편수, 추석에는 송편과 토란국을 끓였다. 여기에 빠지지 않고 올리는 음식이 홍해삼과 채나물이다. 홍해삼과 채나물은 어디에서도 보지 못했다. 조랭이 떠국, 개성편수, 개성약과, 홍해삼, 채나물 등을 차례상에 올렸다. 우리가 명절이면 만들어 손님들에게 대접했던 음식들이 개성식이라 단정하기보다 경기중부음식(?) 중 약간 부유층의 음식이 아닌가 생각된다.
내가 만들었던 개성식 명절음식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었다.
첫째는 음식이 정갈하고 화려하다.
작가는 밥상을 받으면 상에 꽃이 핀 것과 같다고 표현했다. 나는 그중 한 가지를 꼽으라면 개성 보쌈김치를 추천하겠다. 우리는 겨울 김장김치로 보쌈김치가 빠지지 않았다. 추운 겨울날 따뜻한 아랫목에 앉아 상 위에 놓인 보쌈김치를 보면 상 위에 꽃이 피었다는 표현이 이해가 간다. 막 항아리에서 꺼낸 보쌈김치를 보시기에 담아 상의 가장 가운데 놓는다. 그 정갈함과 화려함이 개성음식의 가장 큰 특징이다.
보쌈김치의 덮인 배춧잎을 위에서부터 걷으면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붉은 실고추와 흰 밤 채와 잣이다. 시각적인 특별함에 미각적인 특별함은 그다음이다. 잣을 하나 입에 넣으면 푹 익은 김치국물과 어우러진 잣의 풍미가 입 퍼진다. 색과 맛이 화려한 음식이다. 음식의 화려함은 고명이 담당한다. 제사상에 올리는 조기찜도 다른 지역에서는 보통 세 가지 올려도 화려한데 다섯 가지를 올린다. 황색과 백색의 계란지단과 붉은색의 실고추에 검은 석이버섯 흰색이나 녹색의 파채까지 올리면 조기찜은 한층 화려해진다.
두 번째 특징은 재료의 다양성과 재료 하나하나 살아있는 맛이다.
개성음식은 재료의 고유한 맛과 특징을 잘 살린다. 재료에 따라 고기요리는 고기 육수를 넣고 생선요리는 생선육수를 넣는다. 여러 재료 섞지 않는다. 재료의 모양도 원칙이 있다. 야채 무침을 할 때 모든 재료를 채를 치던지 납작납작하게 하던지 통일성이 있다. 여러 재료가 모일 때 색을 통일하던지 모양을 통일하여 음식이 깨끗해 보인다. 맛 또한 재료가 뭉개지지 않고 씹을 때 하나하나 살아있는 느낌이다.
세 번째 특징은 음식을 담는 그릇이다.
작가 박완서는 '마망'에서 손님들이 독상을 받았다고 한다. 독상에는 여러 음식들이 골고루 소담스럽게 담겨있고 한 사람이 먹기에는 많은 양이었다고 한다. 김서방이 먹은 음식을 이서방에게 주지 않았다는 표현이 있다. 그 독상에는 흰 종이가 한 장씩 마련되어 남는 음식을 싸 갈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고 한다. 이 얼마나 낭만적이고 배려심 있고 친환경적인가? 음식의 완성도는 그릇이다. 음식에 따라 다르겠지만 한식은 흰 백자가 가장 잘 어울린다. 백자에 담을 때 재료의 색이 산다. 요즘 나오는 코닝과 같은 실용적인 그릇은 음식이 가벼워 보인다.
도시 직장인이 출근길 바쁜 발걸음이나 농촌의 태양아래 허리를 구부리고 일하는 모습을 본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먹고살기 위한 일상이다. 먹는 행위가 탐욕이 아니라 인간답게 살기 위한 행위이기를 바라는 것이 모든 사람들의 바람이다. 정성스러운 밥 한 끼에 감동할 수 있다. 먹는 사람들이 자존감을 느낄 수 있는 한 끼가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명절음식을 며느리들이 모여 함께 만들고 일가친척이 함께 먹었다. 우리의 명절은 그런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