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쌈김치
식구들이 밥상 앞에 앉는다.
따뜻한 국을 떠서 밥 옆에 놓으면 상차림이 완성된다.
밥상 한가운데는 보쌈김치 자리다. 방금 독에서 꺼냈다. 잘 숙성된 시큼한 냄새가 코끝을 자극한다. 어머님은 오른손에 젓가락을 들고 왼손은 두 손가락을 이용해서 보쌈김치의 잎을 벗기신다. 모든 식구가 보고 있다. 약간의 긴장감마저 든다. 먼저 가장자리에 있는 푸른 잎을 벗기고 다음 연두색잎을 벗기면 가장 안쪽에 노란 잎이 보인다. 극적인 장면을 연출하기 위해 가장 안에 있는 잎은 남기기도 한다. 가장 안에 있는 노란 잎을 연장자이신 아버님께서 젓가락으로 벗기시면 그 모습을 보고야 비로소 나머지 사람들이 수저를 들고 밥 먹을 준비를 한다.
맛이나 시각적으로 밥상 위 어떤 반찬도 보쌈김치를 넘어서지 못한다. 밥상 위에 마치 꽃이 핀 거 같다. 김치 맨 위에 곱게 채를 썬 밤의 흰색, 싱싱한 푸른색의 고수잎에 가늘게 썬 실고추의 붉은색과 흰 잣이 살포시 놓여있다. 색색의 고명 아래는 붉은 양념이 자리한다. 이 양념은 보쌈김치의 맛을 담당한다. 양념을 헤치면 가지런한 배추의 흰 줄기가 보인다. 배추 줄기 사이사이에 나박나박 썬 무와 배 동태살 마른오징어까지 보인다. 이 재료들은 버무리는 대신 진한 양념과 어우러져 각 재료의 맛을 낸다. 이 모든 재료를 배춧잎으로 싼다고 해서 보쌈김치다.
맨 위에 놓인 잣을 하나 집어 입에 넣는다. 숙성된 시큼한 김치국물에 밴 잣의 풍미가 입 안에 퍼진다. 각이 잡힌 배추줄기는 배와 함께 먹을 때 동태살과 먹을 때 오징어와 먹을 때 각기 맛이 다르다. 안에 있는 내용물을 모두 먹으면 보쌈김치에서 배춧잎만 남는다. 가장 안쪽에 노란 잎이 자리하고 노란 잎을 다 먹으면 연두색잎이 나온다. 연두색 잎을 다 먹으면 진한 초록잎이 남는다. 잎은 너무 커서 한 사람이 가져다 먹기에 불편하다. 이때 어머님께서 두 손가락으로 쭉쭉 찢어 그릇에 걸쳐 놓으신다. 보통은 어머님이 배춧잎을 찢지만 내가 눈치 빠르게 찢어놓기도 한다.
보쌈김치의 맛은 칼칼하고 시원하다. 양념이 강하지 않고 고급스러운 맛이다. 독에서 바로 꺼낸 김치국물은 마치 사이다같이 쨍하다. 김치냉장고가 없던 시절 김치맛은 시간에 따라 다르다. 약간 덜 익은 상태에서 먹기 시작해서 김치가 익어가면 우리는 김치에 맛이 들었다고 표현한다. 김치가 푹 익은 시큼한 맛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많다.
김장의 첫 관문은 배추의 선정이다. 배추의 통이 단단하고 여물어야 김치가 겨울 내내 무르지 않는다. 가능한 한 무게가 많이 나가는 배추가 좋다. 배추의 품종에 따라 모양도 맛도 다르다. 우리는 보쌈김치를 해야 하기 때문에 채가 긴 배추가 좋다. 배추가 구해지면 김장하기 전날 절인다. 100 포기 넘는 배추를 절이는 일은 만만치 않다. 누른 잎 상한 잎을 떼고 배추 꼬리를 자르고 4 등분한다. 소금에 물을 풀어 배추를 담근다. 가슴까지 오는 통에 머리를 거꾸로 박고 소금물이 묻은 배추를 아래서부터 켜켜로 쌓는다. 몇 시간이 지나면 배추의 숨이 죽는다. 배추 손질에 절이는 과정을 마치고 나면 해는 뉘엿뉘엿 지기 시작한다. 바람이 차다. 저녁 식사 후 완전무장을 하고 밖으로 나가 배춧잎 사이사이 소금을 뿌린다. 이렇게 소금 뿌리는 일을 손친다고 어머님은 표현하셨다. 배추 절이는 일은 밤을 새워 진행된다. 가장 힘든 일이다.
본격적인 김장준비는 벌써 며칠 전부터 시작되었다. 시간 날 때마다 마늘, 쪽파, 갓, 미나리, 새우 황석어 까나리 등 각종 젓갈류, 보쌈김치에 들어갈 잣, 실고추, 밤, 동태 오징어 등 해산물도 손질해 놓는다. 우리 집 김장 재료 중 특이한 것은 재료에 고수가 들어간다. 요즘은 동남아 음식을 많이 먹기 때문에 고수라는 채소를 대부분 알고 있다. 전에는 절에서 스님들이 텃밭에 심어 절음식이라 생각했다. 고수는 맛이 독특해서 먹지 못하는 사람도 많다. 우리 집 김장에는 고수를 상당히 많은 양을 넣는다. 김장을 한창 많이 할 때 고수 구하기가 어려워 강화까지 가서 사 왔다. 김장 김치에 고수를 넣는다고 하면 고수의 독특한 맛을 상상하지만 고수가 김치에 어우러지면 자신의 독특한 맛은 사라진다. 보쌈김치에 들어갈 재료(실고추, 채친 밤, 고수잎, 사각형으로 자른 오징어, 손질한 동태. 나박나박 썬 무와 배, 손질한 황석어)는 그릇에 담아 따로 보관한다.
아침부터 김장할 사람들이 모인다. 양념 버무리기가 시작된다. 가장 먼저 씻어 놓은 무를 채친다. 커다란 함지박 두 개정도 무채가 준비되면 각종 재료를 넣고 양념을 만든다. 양념은 포기김치 깍두기 보쌈김치 호박김치 등 모든 김치의 기본이 된다. 양념이 전체 김장의 맛을 좌우한다. 양념을 버무리는 일은 힘든 노동에 가깝다. 어머님은 양념 버무리는 일은 나에게 시키지 않으셨다. 맏며느리에 대한 배려였다고 생각된다.
김장 날 하이라이트는 함께 먹는 밥이다. 돼지고기 수육을 삶고 버무린 양념이 준비되면 배추에 싸서 쌈을 먹는다. 국은 된장을 넣은 날배춧국이 맛있다. 함께 먹는 점심은 너무 맛있어 사람들은 올해 김장이 맛있을 거라는 덕담을 한다.
점심을 먹은 후에는 본격적으로 보쌈김치 만드는 일이 시작된다. 보쌈김치 장인이라 할 수 있는 어머님 친구 중 한 분이 배추 손질을 하신다. 채가 긴 배추 통째로 약 2센티 정도 길이로 자른다. 너무 큰 줄기는 빼기도 하고 너무 허술하면 다른 쪽의 줄기를 가져오기도 하며 보쌈 하나에 들어갈 수 있도록 만들어 커다란 함지에 차곡차곡 쌓아 놓는다. 올해 보쌈김치를 100개 할 예정이다 하면 준비한 줄기의 숫자가 100개가 되어야 한다. 줄기를 뺀 나머지 배춧잎은 모두 모아 여린 잎 중간잎 큰 잎으로 분류해 놓는다.
보쌈김치 만들 재료가 준비되면 마루에 큰 상을 놓고 모두 둘러앉는다. 상 가운데 무조각, 김장 양념, 채친 밤, 고수잎, 실고추, 잣, 마른오징어 조각, 동태살까지 모든 재료를 올려놓는다. 보쌈을 쌀 사람들은 상에 빙 둘러앉는다. 사람마다 상 앞에 자리를 마련한다. 마련한 앞자리에 우선 푸른 배춧잎을 둥글게 펼치고 푸른 잎 위에 연두색 배춧잎은 펼치고 가장 위에 노란 배춧잎을 펼쳐 놓는다. 배추 줄기 덩이를 하나씩 받아 그 위에 놓고 사이사이 각종 재료를 박는다. 가장 위에 양념을 언고 그 위에 고수 실고추 잣으로 장식을 한다. 노란 잎부터 연두색잎 그리고 푸른 잎으로 마무리해서 싸주면 하나의 보쌈김치가 완성된다.
완성된 보쌈김치를 모두 모아 지하 창고에 놓인 독에 차곡차곡 담는다. 보쌈김치가 뜨지 않게 돌로 눌러 놓는다. 사흘이 지나면 어느 정도 물이 생긴다. 물이 적으면 골마지가 끼기 때문에 사흘 후 젓갈을 끓인 물을 식혀서 부어 물을 보충한다. 일주일 이상 익어야 맛이 난다. 식사 때마다 하나씩 꺼내 상에 놓는다. 가장 정성껏 담은 김장김치는 설날 차례상에 올린다. 차례를 지내고 세배를 마치면 모두 모여 떡국을 먹는다. 개성사람들이 먹는 조랭이 떡국과 편수 보쌈김치는 잘 어울린다. 맛이 깨끗하고 정갈하다.
김장하는 날에 보쌈김치만 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 포기김치가 김장의 주인공이다. 모든 김치의 맛은 양념이 담당한다. 4 등분한 통배추 사이사이 양념을 넣는 포기김치가 마무리되면 다른 종류의 김치를 담는다. 총각김치 파김치는 재료만 준비되면 김장양념에 버무리면 된다. 김장김치의 종류가 많을수록 겨울 상이 풍성하다. 채를 썰고 남은 무를 깍둑깍둑 썰어 양념하면 깍두기다. 깍두기를 담는 독은 통이 좁고 긴 항아리다. 보쌈김치 배추를 다듬고 남은 배추머리를 늙은 호박에 버무리면 호박김치가 된다. 호박김치는 호박김치찌개를 해 먹는다. 손질하고 남은 배추 잎을 모두 모아 남은 김장 양념을 넣고 버무리다 설탕과 깨소금 참기름을 넣으면 김장 겉절이가 된다. 모든 김치는 먹는 순서가 있다. 김장날 저녁 반찬으로 이 겉절이가 가장 먼저 상에 올라온다. 호박김치는 푹 익으면 질겨지고 맛이 없어 익기 전 빨리 먹어야 한다.
모든 재료를 어느 부분 하나 허트르 버리지 않는 선조들의 지혜가 놀랍다.
김장문화는 많은 식구들이 적은 비용으로 맛있게 겨울을 보낼 수 있는 가성비 좋은 현명한 전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