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으로 하나되는 동질감
“큰엄마 집에 오면 마음이 편안해져요.
미국에서 생각 많이 났어요.
오늘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큰엄마 작은엄마들 사촌 동생들도 봐서 좋았어요.
안녕히 계세요.”
“그래. 와줘서 고맙다. 너무 멀리 살아서 이제 보기 힘들 거라 생각했는데...
건강하게 잘 사는 모습을 다시 봐서 좋구나.”
작은집 큰딸이 새해 차례에 참석하고 돌아가면서 나에게 인사를 했다.
작은집 큰 동서에게서 연락이 왔다. 결혼해서 미국에 사는 큰딸이 이번 설에 참석할 거라고 했다. 나는 의아했다. 설을 쇠러 왔으면 자기 시댁에 가야지 친정도 아닌 친정의 큰집 제사에 참석하겠다는 것이 요즘 세상에 흔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조카는 외국에서 생활하면서 명절이면 모두들 모여 차례를 지내고 음식을 먹었던 생각이 많이 났다고 한다. 시댁은 차례를 지내지 않아 여행을 가셨고 남편의 직장 때문에 돌아가야 하는데 이번 결혼 전 분위기를 느끼고 싶어 남편을 먼저 보내고 큰집에 왔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들은 나는 보람되고 기뻤다. 그동안의 제사를 준비하면서 수고로웠던 생각은 사라지고 마음이 찡했다. 30년 이상 제사를 지내왔다. 시어머님께서 제사를 물려주시고 이제까지 내가 어떤 마음으로 제사를 지냈는지 앞으로는 어떨 것인지 혼란하던 시기 '아 ~ ' 하고 머리를 치게 만드는 사건이었다.
제행무상(諸行無常, 우주의 모든 사물은 늘 돌고 변하여 한 모양으로 머물러 있지 아니함)
우리 시댁은 이북에서 피난 오셨다. 아버님의 고향은 개성이다. 고향에서 시아버님의 부모님은 5형제를 두셨다. 그중 둘째인 아버님은 동생과 두 분만 남한으로 내려오셨다. 그래서 두 분은 각별하셨다. 두 집안은 명절을 함께 보내시고 할아버지 할머니 제사를 모셨다. 우리가 장남이기 때문에 그 제사가 우리에게까지 이어졌다. 설날과 추석에 작은 집의 자손들도 우리 집에 와서 함께 제사를 지내고 명절을 보냈다. 출가한 여자 형제를 제외하면 남편의 3형제와 아이들, 작은집 2형제와 아이들, 합하여 명절이면 2~30명이 함께 차례를 지냈다.
많은 음식을 차리고 많은 사람이 모이고 명절은 마치 잔칫집 같았다. 고향을 그리는 방법 중 가장 끈끈하게 연결되는 것은 고향음식을 함께 먹는 것이다. 어릴 때 북한 사람들은 얼굴도 붉은색일 거라고 생각할 정도로 이북의 상황에 무지했는데 내가 그 시절 어머님과 만들었던 음식은 대부분 개성에서 드셨던 음식이라고 한다. 당시만 해도 개성에서 피난 오신 분들이 아름아름 음식 재료를 파시기도 했다. 친척 분들은 이러한 재료를 구해 오셨다. 어머님은 고향이 개성은 아니었지만 음식에 대한 조예가 깊으셨다. 이야기만 듣고 만드신 음식은 어머님 손에서 한층 화려해졌다. 음식을 완성하기까지 많은 손이 갔다. 음식이 화려할수록 며느리의 일은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개성음식을 전문으로 하는 고급 음식점이라 해서 가봤다. 전에 만들었던 보다 가볍고 맛도 덜했다. 그 시절 집에서 손님들에게 대접했던 음식을 돌아보면 맛과 영양은 물론 장식까지 상당히 고급음식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외식이 흔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남의 집을 방문하면 밥 한 끼 대접하는 것이 미덕이었다. 철 따라 먹어야 하는 제철음식, 장아찌와 같은 저장음식, 김장김치 등등 언제든 밥상은 풍성했다.
음식을 만드는 데는 여자들의 수고로움이 있다. 맏며느리라는 위치는 이 수고로움의 중심에 있을 수밖에 없다. 사람이 살기 위해 먹는다고 생각한다. 명절을 지내고 나면 사람이 먹기 위해 사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 변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통은 지키되 형식은 간소화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창 대장금이라는 드라마가 유행했다. 드라마는 우리나라는 물론 먼 중동의 여러 나라까지 수출되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음식을 만드는 모습에 빠져들었다. 인터넷 요리 채널을 보면 다른 사람이 음식을 만드는 모습만 보고도 행복을 느낀다. 몇 초만에 음식이 뚝딱 만들어지는 모습은 통쾌하기까지 하다. 요즘은 요리 전성시대다. 요리에 대한 인식이 달라져서 누구나 요리한다. 그때는 왜 그렇게 음식 만드는 것이 힘들었는지... 여자만이 부엌에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 며느리이기 때문에 자율적으로 하지 못하는 환경 등으로 음식을 만드는 사람의 위상이 별로였다. 하지만 음식 만드는 것을 싫어하지는 않았다.
제사를 맡으면서 음식의 가짓수를 대폭 줄였다. 대신 여러 식구들이 먹을 수 있도록 몇 가지를 집중적으로 만들었다. 다음은 요리의 장식을 없앴다. 화려한 고명은 사치라 생각했다. 의상에서 화려한 치장이 눈에 띄듯이 음식에서도 장식이 화려하면 '아~~'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명절음식이 내 손으로 내려오면서 우리의 음식은 점점 그저 그런 음식이 되어갔다.
나에게는 음식에 대해 함께 만들고 함께 먹는 전통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현실에 맞게 변화하는 것이다. 하지만 함께 조상을 모시고 명절을 함께 보내는 전통은 지켜지길 바랐다. 만드는 것에 대한 부담을 줄이려고 노력했다.
"형수님 간단히 하셔요."
"형님 간단히 하셔요."
시부모님이 돌아가시고 형제들이나 동서들도 간단히 차릴 것을 원했다.
결정적으로 제사의 풍습을 줄인 계기는 코로나였다. 코로나로 우리나라는 물론 전 세계적으로 사람이 모이는 것을 제한했다. 형제는 고사하고 이웃 간에도 남의 집에 가는 것, 남이 우리 집에 오는 것이 어려운 문화로 바뀌었다. 그동안 아이들은 자랐고 결혼을 하거나 외국으로 나갔다. 명절 증후군은 일을 하는 며느리들보다 아이들이 더 겪는지 남아 있는 아이들도 점점 제사에 참석하지 않았다. 제사라는 형식에 변화를 주어야 한다는 생각은 오래전부터 있었다. 제사를 모시고 돌아가는 길 시동생들도 제사의 규모를 줄일 것을 제안했다. 나 역시 제사는 꼭 이렇게 해야 한다는 형식을 고수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전원주택으로 이사 왔다. 형제들이 사는 곳에서 꽤 거리가 있다. 나는 동서들에게 음식을 한 가지씩 해서 당일날 오라고 했다. 형제들끼리 간단하게 예를 올리는 것으로 명절을 보냈다. 그나마 손녀가 예쁜 한복을 입고 절하는 모습으로 명절 분위기를 대신했다. 모두들 돌아가고도 오랫동안 따가운 햇살이 비쳤다. 몇 날 며칠을 북적이며 부엌을 오갔던 바쁜 명절은 이제 추억으로 남았다.
어떠한 힘도
시간을
이길 수는 없다.
모든 것이 추억이 되었다.
제사를 보고 자랐던 아이들은 그 기억할 것이다. 어린 시절 찾았던 큰집의 차례상, 어른들에게 올렸던 세배, 함께 둘러앉아 먹었던 음식들은 그들의 속에 있다. 이것이 결국은 그들이 살아가는 힘이 될 것이다. 미국에 사는 조카가 제사에 참석을 위해 우리 집을 찾은 것이나 직장 때문에 멕시코에 사는 시동생이 한국에 오면 우리 집을 찾는 것은 오래 함께 했던 시간 덕분이라 생각한다.
외국 사는 동서의 카톡에는 명절에 먹었던 개성편수 사진이 실렸다. 먼 이국땅에 살면서 고국의 형제들과 먹었던 음식이 그곳에서도 만들어 먹는 모양이다.
성과 본이 같아 같은 조상을 모신 사람들이 모여 고유한 음식을 나눠 먹는 동질감 이것이 제사의 주된 목적이다. 제사라는 형식을 통해서 그들이 먹었던 음식이 마음에 위안이 되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