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하루, 단 한 순간이라도 나다움을 만났다면
퇴근 후 씻고 저녁을 먹고 주방이 마무리되면, 무리 동물이 각자 흩어져 제자리를 찾아가듯 우리 부부도 각자 정해진 소파 자리에 엉덩이를 깊숙이 밀어 넣고 '자기 정비' 시간을 갖는다. 남편은 열을 올리며 핸드폰 게임을 하고 나는 아이패드를 열고 오늘 하루의 감정을 되돌어보며 다이어리에 남긴다. 아직 잠자리에 들려면 조금 남았지만 그 '소파의 시간'이 되면, 비로소 몸도 오늘 하루치의 소모량이 모두 끝났다는 신호를 알아차린 듯하다. 몸의 긴장이 탁, 풀리면서 정신이 맑아진다.
'아, 오늘 하루도 무사히 버텨냈다.'
집이 아닌 외부 공간에서의 긴장감, 타인과의 미묘한 감정의 엇갈림, 뜻하지 않는 사건 사고, 우연한 행운과 비운 그리고 시도 때도 없이 출렁이는 감정의 기복. 어떤 인생에서든 일상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같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제각각의 이유로 고될 수밖에 없다. 누군가에게는 보통의 하루가 또 누군가에게는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강렬한 의미가 되었을 오늘, 나는 여전히 강박적인 불안에 시달리며 하루하루를 버틴 나를 위로한다.
악동뮤지션의 찬혁이 언젠가 혼자 사는 프로그램에 나와서 하루를 마무리하는 자신에게 늘 묻는다고 했다. '오늘 하루도 이찬혁스럽게 잘 살았나.' 100프로 그렇다고 말할 수 있는 날은 매우 뿌듯하고 만족스럽다고 했다. 유난스러운 행동과 옷차림, 어눌한 말투에 많은 이들이 그를 조롱하는 듯 보였지만, 정작 자신은 남들의 시선조차 자신의 일부처럼 받아들이며 즐기는 듯했다. 연출인지 연기인지 몰라도 내 눈에 그는 충분히 자신을 사랑하며 만족스러워 보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다고 하지만) 나 또한 49:51 사이 E와 I의 경계에 있는 사람이라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새로운 이야기를 나누면서 에너지를 얻을 때도 많지만, 사람을 상대하는 것 자체가 곤욕스러울 정도로 피곤할 때가 종종 있다. 언젠가부터 전화보다 문자나 메일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더 편해진 것도 사실. 말보다 글이 적당한 거리감을 유지하면서 감정의 쿨타임을 갖게 해 주기 때문이다. 더불어 대화의 공백을 참지 못하는 사람들에겐 쓸데없이 소비적인 리액션이나 감정의 과잉도 막아주기도 한다. 직업병처럼 낯선 사람들과도 두루두루 초면에도 살갑게 잘 다가가는 편이지만, 나는 사실 타인을 향한 보호막이 꽤나 두터운 사람이다. 실제로 누군가와 진중한 관계를 맺을 때는 꽤나 조심스럽게 다가가려 하고, 상대방도 그래주길 바란다. 모든 세상사가 인간관계에서 비롯된다는 점에서 이런 양면성은 그동안 사회생활을 하면서 효과적인 가면을 만들어줬던 것 같기도 하고.
그러고 보면, 나를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는 것은 꽤나 용기가 필요한 결단이다. 하루아침에 스타가 되기도, 죽일 놈이 되기도 하는 요즘 세상에서 온전히 나다움을 표현하는 것에 득과 실을 따질 수밖에 없지 않나. 어디까지 가면을 써야 하는지 혹은 어디까지의 민낯을 보여줘야 하는지, 진정성이란 기준은 모호하다. 모두가 자신을 드러내야만 하는 시대가 찾아온다지만(이미 찾아왔다), 여전히 스스로를 정의 내리지 못하고 겉도는 무리들이 내 주변에는 꽤 많다. 새로운 세상에 둔감하거나 거부감이 있다기보다는 남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하거나 스스로의 빛나는 가치를 발견하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사회 문화적인 학습 효과는 미디어의 민주화와 충돌하면서 마치 현대인의 대부분이 인정욕구에 목마른 사람들로 둔갑시켰지만, 결국은 개개인의 성향과 욕망에 따른 양분화가 보일 뿐이다.
자유로운 개인으로 인정받고 싶어 하는 욕망은 알아봐 주지 않기를 바라는 욕망, 다수 속으로 사라지고 싶은 욕망과 짝을 이룬다. 달리 말해서 이 시대의 현대성은 자신을 드러내며 인정받고자 하는 광적인 투쟁뿐 아니라 익명 속에서 자신을 감추고자 하는 은밀한 투쟁이 동시에 일어난다.
<드러내지 않기 혹은 사라짐의 기술> 중에서
다수의 꿈이 공존하는 세상에서 익명성의 욕망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 싶은 욕망과 맞닿아 있다는 이야기에 약간의 위안을 얻는다. 드러내고, 인정받는 것만이 욕망을 충족하는 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나이가 들수록 깊이 깨닫는다. 때때로 자신을 속이면서까지 세상이 원하는 나로 포장해야만 하는 상황도 생기기 마련이지만, 그런 경험들이 스스로를 만족시켰느냐고 묻는다면 쉽게 수긍할 수 없다. 오히려 드러내기 위해 조작된 욕망이 내면의 불안을 키운 거라면 그럴 수 있겠다 싶다. 남들의 시선과 인정이 잠깐의 나를 좀 더 나은 사람처럼 여기게 해 줄 수는 있어도, 진짜 나은 사람으로 나아가게 만들 수는 없었으니까.
결국 '나다움'이라는 것은 나의 욕망과 결핍이 무엇이며, 그것을 자기 방식대로 어떻게 채워나가고 있느냐를 찾아가는 긴 여정인 셈이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나다움을 찾아가는 여정을 곧 삶'이라고 정의하기도 한다. 죽을 때까지 자기 자신이 어떤 사람인 지 모르고 남의 시선과 인정에 이끌려 다니다가 생을 마감하는 사람의 말로는 무척 안타까울 것 같다. 무수한 돈을 모으고, 직업적 명예를 갖는 것이 누구나 꿈꾸는 일관된 욕망처럼 가시화되는 세상이지만 모두가 같은 욕망을 추구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각자의 인생에는 자신의 욕망을 솔직하게 들여다보고 채워가는 과정에서 바로 '나다움'이 드러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매일 저녁 나의 소파 루틴은 구깃구깃 움츠러든 '나다움'을 끄집어내서 생사여부를 묻는 일, 말 그대로 '나의 욕망을 정비하고 점검하는 시간'인 셈이다. 남의 시선과 인정에 눈치 보며 너덜너덜해진 어느 하루에도 아주 작은 찰나의 순간 '나다움'을 발견했다면 그걸로도 충분한 하루였다 위안한다. 잠시나마 타인의 입장은 전부 거두고 온전히 나의 감정, 나의 감각에만 집중해 '나다운 욕망'을 들여다봐주는 것만으로도 참 '나다운' 일과였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