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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RE Nov 27. 2024

최소한의 성취감을 알아차리는 법

작은 것이 쌓여 엄청난 것을 만든다

올해 초부터 시작한 아침 운동을 기대 이상으로 꾸준히 유지하고 있다. 결혼 후 부쩍 살이 찐 남편을 이끌고 헬스장 등록을 시킨 게 2월 말이었나. 처음에는 3개월만 같이 하다가 나는 다시 테니스를 등록할 셈이었다(작년 1년 동안 테니스를 꾸준히 배우다가 이사를 하는 바람에 아직 새로운 선생님을 찾지 못하고 있다).

어릴 때부터 운동 신경이 둔한 나는 어떤 종목을 제대로 마스터해 본 적이 거의 없다. 생활 운동이라 해봤자 아파트에 딸린 헬스장에서 트레드밀(러닝머신)만 뛰어봤지 기구를 사용해 무게를 든다거나 하는 일은 결코 없었다. 물 공포증을 극복해 보겠다고 큰맘 먹고 수영장에 등록한 적이 있었는데, 한 달 동안 발차기만 배우다가 코로나가 터졌다. 곧장 수영장은 폐쇄됐고, 2년 동안 문을 닫았다. 매달 마감을 치던 기자 시절에 굽어진 어깨를 펴보겠다고 1:1 필라테스를 시작했는데, 나만 지켜보고 있는 선생님의 기대에 부응하겠다고 무리한 동작을 버텨내다 허리 디스크가 터졌다. 그 이후로 절대 1:1 수업은 듣지 않으리라 했는데.. 과감하게 테니스(어쩌다 보니 1:1 수업)를 시작한 건, 친하게 지내는 체대 출신의 지인이 "자신과 싸우는 운동을 그만두고, 즐겁게 게임처럼 할 수 있는 운동을 꾸준히 해봐요."라는 조언 때문이었다. 가만히 듣다 보니, 그동안 내가 해온 운동 대부분이 어제와 오늘의 나를 경쟁시키며 몸을 혹사시키는 일들이었다. 어제의 나에게 뒤처지지 않기 위해 맹목적으로 달려들면서 진만 빼는 싸움 같다고 할까. 결국 시간이 지날수록 운동의 기쁨은 사라졌고, '내가 왜 이러고 있지?'라는 괴로움과 자책에 빠지기 일쑤였다. 그렇게 포기했던 운동들의 데이터가 쌓여갈수록 '나는 뭐 하나 끈질기게 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부정적 자의식이 정착했다. 여전히 운동을 할 때마다 내가 가진 인내와 끈기를 가늠하는 실험대에 오른 것 같지만, 그나마 다행인 건 내가 매번 기꺼이 다시 운동을 시작하며 스스로를 실험한다는 것이다.  


본격적으로 헬스장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닫아놨던 시야와 사고가 새로 열린 느낌이다. 몸에 근육을 만들고 지방을 빼는 일이 말처럼 결코 호락호락한 일이 아니다. 0.1g의 근육량 차이에도 희비가 엇갈리는 인바디를 받아볼 때마다 한 달 동안 공들인 시간과 체력에 무력함을 느끼곤 한다. 예전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지금은 우락부락한 몸을 자랑하는 헬스인들을 볼 때면 가끔 경이로운 눈빛이 발사된다. 공들인 몸에는 표면적 아름다움을 떠나 인간의 정신력과 인내, 노력 그 이상의 것을 담고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인간의 경이로움을 나는 요즘 헬스장에서 직관한다.


내가 경험한 또 하나의 세계는 건강한 신체가 건강한 정신으로 지배한다는 말은 진짜였다. 매주 5회씩 꼬박꼬박 아침 운동을 마치고 돌아올 때마다 알 수 없는 작은 성취감들이 쌓여 간다. 누군가는 과부하가 될 때까지 해야만이 '진짜 운동을 한 거다'라고 하지만, 나에게는 정해진 수업에 꼬박꼬박 출석을 하고, 정해진 시간 동안 최선을 다해 운동을 해낸 것만으로도 최소한의 성취감을 달성한 듯한 기분이 든다. 그동안 단순히 운동을 '한다'가 아니라 운동을 '잘해야 한다'는 사고에 갇혀있던 나에게 드디어 운동 그 자체의 진정한 기쁨이 열린 것이다. 아침 운동에서 가장 힘든 것은 운동화를 신고 현과 밖을 나가는 것. 문지방을 넘는 멀고도 (마음먹기) 힘든 고비를 넘긴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운동을 하느냐 안 하느냐가 아니라 결국 운동을 가느냐 마느냐의 갈등인 셈이었던 것이다.


숨을 헐떡이며 유산소를 뛰던 어느 날 아침 문득 이런 생각이 머릿속을 스친 후부터 나는 조금씩 운동 강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오늘도 늦잠 대신 운동을 택했고, 몸이 다하는 한 열심히 했고, 즐거웠고, 뿌듯하다. 그럼 이걸로 충분하다!' 이 나이에 아이돌의 몸을 꿈꾸는 것도 아니고, 바디 프로필 찍을 것도 아니고, 나에게 운동에서 필요한 최소한의 성취감은 딱 이만큼이면 됐다 싶었다.


마흔이 가까워질수록 스스로를 잘 믿지 못하는 의심이 커졌고, 내가 만든 한계에 앞이 깜깜해지고 두려워질 때가 있다. 딱히 어떤 목적도 없이 앞으로 나아가야만 한다는 강박은 내 삶을 지배했고, 운동에서조차 나를 다그친 것이다. 늘 좋은 결과를 남들에게 보여줘야 하고, 칭찬을 받고 싶은 인정 욕구는 목적의식을 알 수 없는 욕망들로 재생산된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들을 채우기 위해 발버둥 친다. 이미 차고 넘치는 내 안의 항아리는 보지 않고, 빈 항아리에만 무력함을 느끼는 것이다. 부족한 것을 채우고, 노력 끝에 이뤄내는 성취감은 인간에게 삶의 동력이 되는 것은 맞다. 하지만 그 성취감이 남들의 기준이나 시선으로 초점을 잃게 되면 삶은 갈수록 치열해지고 피곤해질 수밖에 없다. 때로는 내가 느끼는 최소한의 성취감에 주파수를 맞추고, 작은 성취감들을 매일매일 느끼며 조금씩 나아가는 훈련이 필요하다. 처음으로 3km를 쉬지 않고 달려봤을 때, 5km 러닝의 신기록을 기록했을 때도 무척 기쁘지만, 하루 더 늙은 오늘의 내가 어제와 똑같은 운동량을 소화한 것만으로도 값진 성취다. 운동이든 삶이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각자의 레이스를 할 뿐, 남의 레이스에 내 페이스를 맞추기 시작하면 언젠가 스스로 쓰러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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