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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RE Dec 11. 2024

나는 내가 빛나는 별인 줄 알았어요

내복과 할머니의 손등

어릴 적 할머니의 손등을 잡아당기는 고약한 버릇이 있었다. 검버섯으로 얼룩덜룩한 손등의 얇은 피부에는 탄력이란 걸 찾을 수 없었다. 얇은 피부를 두 손가락으로 살짝 잡아당겼다 놓으면 내 것과는 다르게 슬로비디오처럼 천천히 꺼지며 퍼져갔다. 어린 눈에 그게 그렇게 신기했다. 세월에 대한 애잔함을 알기엔 너무 어린 나이었다.


흐물거리는 손등과 달리 굳은살과 습진으로 점철된 손바닥은 단단했고, 누구보다 강했다. 맨손으로 뜨거운 냄비를 서슴없이 잡으셨고, 찬물로 설거지며 손빨래며 마다하지 않으셨다. 1년에 한두 번 정도 우리 집에 오셔서 며칠간 머물다 가시곤 했는데, 그때마다 우리 집의 밀린 살림을 몰아서 해주셨다. 할머니가 와 계실 때면 그동안 보지 못했던 식재료와 우리 가족이 몇 달은 먹고도 남을 음식들이 냉장고에 가득 찼다. 어릴 적 내가 기억하는 할머니는 흐물거리는 손등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 단단한 손바닥으로 손주 셋을 키우고, 맞벌이하는 자식들의 집들을 오가며 수 십 년을 넘게 살림을 도왔다.


부쩍 추워진 날씨에 서랍 깊숙이 넣어놨던 히트*을 주섬주섬 꺼내다가 불현듯 할머니의 축 쳐진 손등이 떠오르는 게 아닌가. 내복과 할머니의 손등이 어떻게 사고의 회로로 뻗어나갔는지 잘 모르겠다. 무의식적으로 내 손등의 피부를 살짝 들어 올려봤다. 다행히 아직은 잡아당긴 피부가 재빠르게 펴지며 제자리로 회복됐다. 휴우.


나이가 든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신체적 한계를 맞닥뜨리게 한다. 20대 때는 에디터라는 직업상 야근이 일상이었고, 체력의 한계보다는 정신적 방황이 나를 더 지치게 했다. 일에 대한 책임감은 모든 것을 망각하게 만들었다. 사실 몸을 돌볼 여유도, 이유도 없었다. 30대가 되어서야 그 시절 외면했던 몸의 과부하를 체감하기 시작했다. 신체가 정신을 지배한다는 말처럼 체력의 한계를 느끼게 되자, 무서운 속도로 나이에 매몰되었던 것 같다. 그렇게 한 해가 질 때마다 내 앞엔 무수히 많은 벽들이 생겨났다. ‘아, 나는 여기까지인가?’


아득했던 한계가 가시화됐고, 조급함이 생겼다. 한 살이라도 어릴 때 ‘나이에 맞는 인생 숙제를 지금 해놓지 않으면 뒤쳐지진 않을까’ 하는 사회적 욕망이 마음을 재촉했다. 30대 중반이 되면서는 아무리 페달을 밟아도 제자리에만 머무는 것 같은 답답함이 나를 옥죄어왔다. 앞만 보고 달리기에 바빴던 20대와 달리 30대의 레이스에선 적당한 노력으로는 벽을 부수기가 쉽지 않았다. 벽 앞이 멈춰 서서 자기 연민에 빠져 허우적대던 날들이 길어질수록 더욱 깊숙이 나이에 매몰됐다. 마치 할머니의 흐느적대던 손등처럼 내 앞날의 탄력도 힘을 잃은 것 같았다.


벽이 보이면 부숴야지,
왜 멈춰 서서 돌아가려고 해.
근데 그거 벽 맞아?


새로운 커리어로 이직을 하고 몇 달 안 됐을 무렵, 도저히 이 분야는 아닌 것 같아 퇴사 상담을 했을 때 친한 선배이자 직속 상사였던 분이 내게 한 말이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내 앞에 놓인 벽의 존재를 의심했다. 그동안 한계라고 느꼈던 벽이 사실은 내가 쳐놓은 울타리였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실패할까 봐, 상처받을까 봐, 혹시 해내지 못할까 봐.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도망가기 위한 바운더리를 스스로 쳐놓은 것이었다. 뜀틀을 성공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건 겁먹지 않고 한 번에 뛰는 것인데, 나는 늘 전력질주로 도움닫기를 하다가 구름판에서 멈추는 꼴이었다. 내 앞에 나이라는 벽을 쳐놓고 넘어갈 엄두를 못 냈고, 한계의 커튼을 겹겹이 쳐놓았다. 그 이후로 나는 어떤 일을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선배의 조언을 떠올린다. 마흔을 앞두고 찾아온 불안도 어쩌면 나 스스로 나이에 고립시키고 있던 것일 수 있다. 그렇다면 최소한 내가 만든 벽 앞에서는 무너지지 않아야 한다. 할머니의 손등을 뒤집어보면 연륜으로 다져진 손바닥이 있었던 것처럼, 20대와 30대의 쌓아온 내면의 단단함이 40대의 나를 지켜줄 것이라고, 오늘도 나는 스스로를 위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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