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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RE Nov 13. 2024

나를 소진하며 완벽을 추구하는 이유

괜찮지 않아도 괜찮았으면.  

완연한 가을이 왔으니 계절 탓도 해보고, 연말이 가까워지니 나이 탓도 해보지만 어쩐지 이번에는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 같지 않은 위기감이 든다. 마음 같아서는 일찍이 겨울잠에 들어가 따듯한 봄이 오면 새롭게 짠! 하고 등판했음 싶다. 당장 내가 없으면 안 되는 일이라는 건 이 세상에 없겠지만, 내가 만든 내 세상에서의 의무감과 책임감은 무겁게(혹은 무섭게) 나를 짓누른다. 때론 뒤쳐질까 봐 두려워서, 어느 날은 게으름에 자책하면서, 나는 오늘도 꾸역꾸역 나를 일으킨다.


무기력에 허우적대던 어느 아침이었다. 침대에서 좀 더 뭉개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아침 루틴을 깨면 큰 일이라도 날 것 같은 강박이 나를 채찍질했다. 잠이 덜 깬 눈으로 주섬주섬 운동복을 찾아 갈아입었다. 부쩍 차가워진 공기에 발걸음이 점점 더 느려졌지만, 헬스장까지 묵묵히 완주했다. 무거운 쇳덩이를 들고 지끈거리는 근신경과 씨름을 하던 중. 하나, 둘, 셋…열 하나, 열둘. 꾸역꾸역 세트를 채우다가 잠시 쉬는데, 갑자기 울컥(말 그대로 울컥) 눈에 물이 가득 고이는 게 아닌가. 무척이나 당황스러웠다. 무게가 버거웠던 걸까? 운동이 하기 싫어서일까? 눈에 뭐가 들어갔나? 케이팝 가수의 노래가 슬펐나? 이유가 뭐든 그 자리에서 기구를 붙잡고 엉엉 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얼른 고개를 숙여 침을 꿀꺽 삼키고 눈물을 참아냈다. '아, 이런 게 마흔에 찾아온다는 마음의 지진이구나. 지금 내 마음속에 지진이 일어났구나.' 


누가 억지로 등 떠밀어 운동을 시작한 게 아니었다. 더 이상 정해진 시간에 출근을 하지 않아도 되는 신분이 되었으니, 오전 시간을 최대한 활용해 보고자 늦잠 대신 생산적인 일을 택했다. 어째 내 인생은 나이를 먹을수록 부족한 빈틈만 보이는 건지. 더디게 붙는 근육처럼 매일매일 스스로를 몰아붙여도 좀처럼 채워지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렇게 뭔가를 하면서도 불안해지는 날들이 쌓여갔다. '과연 이렇게 한다고 될까? 더 해야 하나' 스스로에 대한 의심은 되려 무기력 속으로 나를 밀어 넣었다. 러닝 머신 위를 오래 뛰다 보면 두 다리가 무감각해지는 것처럼, 언젠가부터 온전한 나만의 감각을 알아차리기가 어려워졌다. 가끔 삶에 있어서도 지금 내가 얼마나 힘이 든 건지, 얼마나 지쳐있는지를 가늠하기 힘들다. 머신 위를 달리는 것처럼 삶도 시간이 알아서 멈출 때까지 계속 일정한 속도로 달릴 수밖에 없다. 기계든 일상이든 잠시 스톱 버튼을 누르면 그만이지만, 자기 연민에 빠져 괜한 엄살을 부리는 것은 아닐까. 여태 잘 달려왔는데 지금 멈춰버리면 다시 달리지 못하는 건 아닐까. 매순간마다 나는 스스로를 다그칠 뿐이다.  


자기 통제는 불안에서 나온다.
통제 추구는 실수나 잘못을 할 때 생기는 부정적 감정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전략이다. 
(중략) 완벽에 대한 추구와 통제는 강한 의무감을 갖게 하는데, 
가볍게는 극도로 규칙적인 일상을 지키느라 자신을 괴롭히곤 한다.
-<어느 날 내 안의 아이가 정말 괜찮냐고 물었다> 중에서


어떤 일이 잘못되거나 실수라도 저지른 날이면, 저 밑바닥에 나를 던져놓고 자책하는 습관은 오랫동안 나의 불안과 두려움을 키워왔다. 어린 시절, 칠판 앞에 불려다가 수학 문제를 제대로 풀지 못하고 자리에 돌아오면, 나는 다음 쉬는 시간까지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전전긍긍했다. 부끄러웠다. 반 친구들 모두가 나를 비웃는 것만 같았고, 친한 친구들조차 그 시간 이후 나를 피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실수와 실패에 대한 불안의 그림자는 아마 그 무렵 내 안에 또렷이 새겨진 듯하다. 나는 내 안의 부끄러운 그림자를 영영 피하기 위해 끊임없이 무언가를 해왔다. 결국 그 무언가가, 아니 무언가라도 해야만이 나를 보호할 수 있던 것이다. 


모든 일을 실수 없이 잘 해낸다는 것이, 도덕적으로 완벽한 사람이 되기 위해 끊임없이 나를 몰아붙이는 것이 곧 나를 괜찮은 사람으로 만들 수 있을 거라는 고립된 강박 관념은 진짜 나 스스로를 위한 것이었을까? 남들에게 더 좋은 사람처럼, 잘 보이고 싶은 욕심은 아니었을까? 


거듭되는 번아웃과 무기력 속에 깊이 박혀 있는 나의 어린 그림자는 나이가 들수록 점점 더 선명해진다. 위로받지 못한 어린 감정은 어른이 되어 불안으로 성장했고, 자기 통제와 도덕적 완벽주의로 분열되어 나를 괴롭힌다. 그동안 상처받은 내면을 외면하고, 내가 모르는 문제 앞에서 다시는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만 안간힘을 썼다. 강박적인 자기 통제는 스스로를 극한으로 몰아서라도 완벽함을 추구하게 만들었다. 지금 내게 필요한 건 내가 모르는 문제를 막아내는 것이 아니라, 어려운 문제 앞에서 ‘잘 모르겠다’ 고 말할 수 있는 용기고, 머리를 긁적이며 배시시 웃을 수 있는 너그러움이라는 걸, 나는 마흔이 다 되어서야 조금씩 알게 됐다. 괜찮지 않아도 괜찮다는 사실을 너무 뒤늦게 알아버렸다. 이제라도 일을 망쳐버릴까, 실수를 할까 두려움에 전전긍긍할 게 아니라 그런 상황이 오더라도 괜찮다, 아니 괜찮지 않아도 괜찮다는 위로가 과연 도움이 되려나. 칠판 앞에서 외롭게 서 있을 나의 어린 그림자를 마주하러 가는 길이 너무 멀게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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