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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rs Fong Apr 25. 2020

승무원 퇴사 후 달라진 점


  승무원이라는 애증의 직업을 그만 둔지도 벌써 3개월이 지났다. 한 달 한 달 받는 스케줄에 시간 가는 줄도 모르게 일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제 그만두고 YOLO 라이프를 즐기며 자유를 만끽하고 있다. 남들은 그만 두면 가끔 비행 가는 꿈도 꾼다는데, 난 어째 비행 관련된 꿈이나 기내 안에 있는 꿈은 당최 나오질 않는다. 미련 없이 떠나 그런 건가? 딱 한번 회사 관련 꿈을 꾼 적이 있었는데, 그만두고 한 일주일쯤 지났을까. 꿈에서 내가 계획했던 일이 모두 틀어지면서, 마카오에 계속 살아야 했고 어쩔 수 없이 매니저와 리조 이닝을 상담하는 꿈을 꿨다. 나 꿍꼬또 리조인 꿍꼬또.




1.



   그만두고 한 달간은 정말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바닥나 버린 체력 게이지를 보충하고 싶었다. 한 달 간은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자고 싶을 때 자고 놀고 싶을 때 놀고 했다. 이제는 알람 맞춰 일어나야 된다는 압박에서 벗어났다는 것이. 더 이상 유니폼을 빨고 다림질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불규칙했던 생활에서 벗어나, 아침엔 일어나고 저녁에는 내 침대에서 잘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도 행복했다.


   그만 두자 마자 한 것은 머리를 노랗게 염색했다는 것이다. 대학생일 때도 승무원 준비한다고 머리를 밝게 염색해본 적이 없었는데 그만두고 나서는 벼르고 별러 왔던 머리 노~랗게 하기를 실천했다. 탈색 3번에 뒷모습만 보면 국적 구분 불가한 사람이 되었지만 평생의 소원을 이뤄 아주 만족스럽다.


   그리고 지긋지긋했던 젤 네일을 싹 다 벗겨버리고 생 손톱을 유지 중이다. 처음엔  승무원이 되어 네일샵을 다니게 되었을 때 (물론 개인적으로 매일 집에서 발라도 되지만, 나는 귀차니즘으로 인해 젤 네일을 한 달에 두세 번 정도 받으며 다녔다) ‘오 나 쫌 멋진 듯’ ‘대접받는 기분이야’ ‘이번엔 또 무슨 색을 할까~’라고 즐겼던 것도 잠시. 일주일에 이틀뿐인 오프 날 손톱을 받기 위해 피곤에 쩌든 몸을 이끌고 두 시간이나 앉아서 손톱을 받는 게 지긋지긋한 일의 연장선으로 느껴졌다. 벗겨지지 말라고 두껍게 두껍게 발라 놓은 젤 네일은 새 손톱이 나기 무섭게 갈아엎고 다시 덮어버렸고, 손톱에 얹혀 있던 그 한 커플의 젤은 나를 숨도 못 쉬게 막아 놓는 답답한 갑옷 같았다. 벗겨 버리고 나니 얼마나 시원하던지.




2.



   그만두고 두 달째가 되었을 때, 피로함이 많이 회복되어 그런지 하나둘씩 그동안 못했던 것을 하고 싶던 욕구들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전공이었지만 쓸데가 없어 가물가물 해진 프랑스어도 다시 공부하고 싶어 졌고, 영어도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시키고 싶어 졌다. 일할 때는 꼴도 보기 싫어서 열었다 덮어버리기를 반복하던 중국어 책도 진지하게 다시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악기를 연주하고 싶어 졌고, 블로그를 시작하게 되었다. 독서에 메말라 있던 나는 일주일에 한 권 이상 씩은 독서를 하기 시작했다. 매일매일 집밥을 만들면서 나만의 시그니쳐 메뉴들을 개발해 내고 싶어 졌다. 운동을 열심히 하고 싶어 졌다.


   일하는 동안에도 물론 가능했을 수 있는 일이었지만, 체력적으로 불가능했다. 항상 사람들과 부딪히고 북적거리는 좁은 공간에서 내가 하고 싶지도 않은 말을 백번 천 번 반복하다 보면, 집에 오면 정말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말도 하고 싶지 않았고 움직이고 싶지도 않았다. 그럴 힘도 없었다. 그저 멍하니 티비를 보며 아무 생각 없이 그날의 일을 잊고 싶었다. 확실히 그만두고 나니, 배움의 욕구와 의지의 욕구, 계획과 희망의 욕구가 가슴 어딘가에서 솟구쳐 올라왔고, 하루하루 바쁘게 이것저것 하고 싶었다. 아마도 방전되었던 에너지가 꽉 차 활동적인 에너지로 전환된 것 만 같았다.




3.



   정신적인 부분 말고도 체력 적인 부분에서도 눈에 띄는 변화가 일어났다. 일단 부종이 사라졌다. 매일 구두를 신고 10시간 넘게 기압이 낮은 기내에서 일하고 돌아오면 다리는 땡땡 부어 있다. 아무리 마사지를 해주고 혈액 순환이 잘 되라고 발을 높이 올려도 보고 베개도 깔고 잠도 자봤지만 소용없었다. 그랬던 그 부종이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종아리는 말랑말랑 해졌다. 당연히 허리, 팔목, 어깨 무릎 발 무릎 발 통증은 말끔히 사라졌다.


   그리고 손발이 따뜻해졌다. 나는 그저 내가 수족 냉증이 있는 사람이라고만 생각했었다. 여름이고 겨울이고 항상 차가웠던 손 발 때문에, 신랑은 시원하다며 손발을 만져주기도 했는데, 어느 날 내가 발을 꼼지락 거리며 신랑 몸에 갖다 대니까 “뭐야 왜 이렇게 뜨거워졌어!! 싫어!! 치워 ㅠㅠ”라는 게 아닌가. 어라? 진짜네? 손발은 거짓말처럼 따뜻해졌고 심지어 어쩔 땐 후끈후끈하기까지 했다.


   피부가 좋아졌다. 한 때 피부 하나는 참 좋다는 소릴 들었던 나인데, 매일 부족한 수면에 불규칙한 패턴. 공기라도 더러운 베이징에라도 다녀오면 피부는 바로 뒤집어졌다. 피곤에 절어 인천 비행을 갔을 때에는 화장을 지운 내 모습을 보시곤 아버지께서 “야.. 야... 피부 좀 어떻게 해야겠다...”라고 안타까워하셨었다. 그만두고 나서는 부족함 없는 수면에 규칙적인 패턴으로 바뀌니 피부가 점점 좋아지더니 급기야는 꿀피부로 바뀌었다. 여드름이나 붉은 기는커녕 어렸을 때 피부로 돌아간 것 만 같았다.


   요 근래 피곤이라는 것을 느껴보지 못했다. 예전엔 정상적인 몸의 상태가 기억이 안 날 정도였고 항상 입에 “피곤해”를 달고 살았었는데, 일을 안 하게 되니 당연한 것이지만 피곤하지 않다. 내가 그렇게 피곤했던 적이 있었을까 싶게 피곤과 거리가 멀어졌다.




4.



   그만두고 심심하지 않냐는 얘기를 듣는다. “이제 심심해질 때도 되지 않았어?” 아직 잘 모르겠다. 그만두고 나서도 거짓말 같이 할 일들이 많이 있다. 물론 소소한 일 들이긴 하지만, 계획했던 책도 읽어야 하고 블로그도 써야 되고 공부도 해야 하고 간간히 바이올린 연습도 해야 하고, 장 봐서 저녁거리도 만들어야 하고, 친구들도 종종 만나서 수다도 떨어야 하고 운동도 해야 하고... 그냥 집에 있는 것 같으면서도 항상 뭘 하고 있다. 아직은 심심하지 않은 것 같다. 친구들은 너 진짜 YOLO다~라고 한다. 사실 욜로라는 게 탕진 잼을 즐기며 사고 싶었던 거 팍팍 사고 여행 다니고 쇼핑하는 것 만이 아니다. 소소한 것이라도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을 하고, 하루하루 재밌게 살고, 스트레스 안 받고 사는 게 진짜 욜로 라이프 같다.


   지금 생각하는 건 이렇다. 내가 앞으로 영원히 일을 안 할 것 도 아니고, 어차피 상황 상 일을 그만두고 잠시 멈추어 숨을 골라야 할 때가 되어 잠시 쉬고 있는 것뿐이다. 어쩌면 이런 기회는 내 인생에 영영 안 올지도 모른다. 지금이 내 인생에 주어진 가장 값진 시간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하루하루 감사하게 즐기고, 나를 위한 시간, 나를 알아 가는 시간, 멀리 뛰기 위해 제자리에서 잠시 도움닫기를 준비하는 ‘도움닫기’의 시간이라 생각한다. 지금이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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