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는 변수가 많은 나라입니다. 한때 저의 회사생활처럼요. 계획대로 된 적이 없습니다. 내일 오후까지 보고서를 제출하라고 해놓고는 출근하자마자 달라고 하는 상사, 인수인계 다 했다면서 업무 펑크 내고 휴가 간 동료. 이것 말고도 무한합니다. 파리 여행도 생각처럼 잘 풀리지 않았습니다. 역시 인생은 내 맘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어쩌겠습니까. 이 또한 여행의 매력이죠.
숙소 뒤에 있던 쓰레기 더미가 복선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파리는 '파업의 나라'입니다. 제가 타려고 했던 지하철 노선도 파업에 동참했네요. 대체 교통편으로 알아봤던 버스도 파업으로 운행하지 않았습니다. ‘이에나 다리’에서 노을이 내려앉은 에펠탑을 바라보려 했거든요. 시간 내 도착할 수 있을지 걱정이었습니다. 구글 지도를 보니 에펠탑 바로 앞 역은 아니지만, 두 정거장 떨어진 역엔 지하철이 정차한다고 나와있었습니다. 파업 소식까지 나오는 구글. 역시 글로벌 기업입니다.
목적지까지 걸어가며 흥겨운 모습을 보았습니다. 노래를 틀고 강가를 행진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풍선을 흔들기도 했고, 노래 박자에 맞춰 박수를 치기도 했습니다. 분위기가 흥겨웠는지 술집 테라스에 있던 몇몇 사람들 대열에 뛰어들어 춤을 췄습니다. 거나하게 취한 사람들을 밀어내지 않고 함께 환호하며 분위기를 이어나갔습니다. 알고 보니 이 행진은 '파업'이었습니다. 파업을 축제처럼 하다니, 선진국의 파업은 남달랐습니다. 아무쪼록 서로 원만한 합의 바랍니다.
빠르게 대처한 덕분에 늦지 않게 '이에나 다리'에 도착했습니다. 이곳은 센강과 에펠탑 그리고 멋진 하늘을 한 번에 담을 수 있는 포토 스팟입니다. 스냅 촬영을 하러 온 한국인 커플도 만났습니다. 노을 지는 풍경 아래서 사랑을 속삭이는 모습은 센강보다 아름다웠습니다. 물론 혼자서 멍하니 풍경을 바라보며 노을을 즐기기에도 좋은 곳입니다. 저는 절대 두 사람이 부럽지 않았습니다.
강 건너 에펠탑이 보였습니다. 이제는 프랑스의 상징을 넘어 유럽의 대표 관광지입니다. 드디어 만났습니다. 에펠탑은 프랑스혁명 100주년 기념으로 개최된 1889년 파리 엑스포 때 만들어졌습니다. 귀스타브 에펠의 설계로 세워져 이름이 에펠탑입니다. 높이 301m의 이 건축물은 당시에 많은 욕을 먹었다고 합니다. 파리 시내의 모습과 어울리지 않아서라고 해요. 그랬던 에펠탑이 이제는 지구 반대편에서도 찾아오는 명소가 되었습니다. 에펠탑에도 변수가 많았네요. 그래서 파리 여행에 변수가 많나 봅니다.
이번 여행의 버킷리스트 '에펠탑 아래 잔디에 돗자리를 깔고 와인을 마시는 것'입니다. 에펠탑에 오기 전 와인을 미리 준비했어요. 에펠탑에도 와인 파는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종류도 많이 없을뿐더러 금액도 터무니없이 비쌉니다. 파리에서 노상 감성을 느끼려면 꼭 미리 준비하세요.
교통 파업에서 여행 변수가 끝인 줄 알았더니 아니었습니다. 잔디밭 앞을 웬 펜스가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현지인으로 보이는 사람에게 짧은 영어와 손짓, 발짓으로 물어보니 ‘동절기엔 잔디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잔디 양생 기간이기도 했고요. 3월 말이면 봄 아닌가요? 아쉬움을 뒤로한 채 와인과 피자, 돗자리를 들고 다른 장소로 발길을 옮겼습니다.
그때 에펠탑에 불이 들어왔습니다. 해가 떠 있을 때는 차갑고 위엄 있던 에펠탑은 조명이 들어오자 따뜻하고 로맨틱한 분위기를 뿜어냈습니다. 가던 길을 멈추고 휴대폰에 모습을 담았습니다. 에펠탑의 밤은 낮보다 아름다웠습니다. 들고 있던 피자는 식어갔지만 마음은 따스했습니다. 주변 모든 것들이 행복으로 가득 차 보였고요. 교통 파업도 모두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 분위기에 행복을 더 하듯 건너편에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렸습니다. 한 가족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서 에펠탑을 올려다보고 있었습니다. 그 옆에 돗자리를 깔고 들고 있던 와인과 음식을 내려놨습니다. 푹신한 잔디는 아니었지만 에펠탑이 잘 보이는 곳이었습니다.
인생 최고의 와인이었습니다. 이름 모를 와인이었지만 어느 술 부럽지 않았습니다. 버킷리스트가 완성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차갑게 식은 피자라도 괜찮았습니다. 와인 한 모금을 마시고 에펠탑을 바라보면 안주가 필요 없었거든요. 돗자리에 둘러앉은 친구들과 한 잔씩 홀짝이다 보니 감성이 폭발했습니다. ‘살면서 힘들었던 이야기’, ‘가족 이야기’, ‘사랑 이야기’ 등 옛 추억을 이야기하며 분위기에 녹아들었습니다. 센스 있는 친구의 선곡 덕분에 모든 게 완벽했습니다. 분위기의 완성은 역시 음악입니다.
진한 파리 감성은 ‘바토 파리지앵 유람선’에서 정점에 달합니다. 파리 야경 Best 5에 항상 이름을 올리는 이 코스를 강력 추천합니다. 보통 야경은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걸 ‘국룰’이라고 합니다. 바토 파리지앵 유람선에서 파리 명소를 바라본 사람이라면 야경의 정의를 다시 정립할 것입니다. 에펠탑과 가까운 선착장에서 출발하여 노트르담 성당을 돌아오는 코스입니다. 파리의 모든 것을 담아 올 수 있습니다.
정각 출발 예정인 유람선에 몸을 실었습니다. 에펠탑은 매시간 정각이 되면 5분간 반짝입니다. 출발 시간을 알리듯 에펠탑이 반짝이기 시작했습니다. 배 위에서 보는 에펠탑 야경은 돗자리에서 볼 때와 다른 느낌이었습니다. 금빛 에펠탑을 수놓는 흰색 조명은 세상 모든 것을 정화하는 아름다움을 가졌습니다. 와인에 취해서 그런 건지 왈칵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한국에 들어가면 갱년기 검사를 받으란 친구의 말을 무시하고 야경에 집중했습니다.
오전에 봤던 오르세 박물관은 밤에 봐도 멋있었습니다. 뒤편에는 한국 생각에 침잠하게 만들었던 루브르 박물관도 눈에 들어왔습니다. 부동산을 고를 때, 낮에 가보고 밤에도 가보라고 하는데 그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밤과 낮의 느낌이 이렇게 크게 차이가 나니까요.
‘아름답다’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야경이었습니다. 강 주위를 둘러싼 건물 불빛은 세상을 포근하게 감싸고 있었습니다. 강에 비친 불빛은 물살에 일렁이며 다채롭게 섞였습니다. 센강 모든 곳을 물들인 야경은 저에게 쏟아질 것 만 같았습니다. 야경에 취해 있을 때였습니다. 누군가 제 옆자리로 다가왔습니다. 휴대폰 카메라를 포함해 총 3대의 카메라를 들고 있는 여성분이었습니다.
앉기엔 비좁은 자리라 제가 안쪽으로 붙었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thank you."라 말하고 제 옆자리에 앉았습니다. 동영상은 고프로 카메라로, 야경은 미러리스 카메라로 촬영했습니다. 사진작가 느낌이 나는 그녀가 옆에 있으니 마음이 이상했습니다. 방금 전 마신 와인 때문일까요? 아름다운 파리 야경 때문일까요? 아니면 파리 야경을 사진에 담고 있는 그녀 때문일까요? 저도 모르게 말을 걸었습니다. 왜냐면 여긴 '파리'니까요.
생활 영어 수준이었지만, 편의를 위해 나눴던 이야기를 한국어로 들려드리겠습니다.
“안녕하세요. 어느 나라에서 오셨어요?”
“안녕하세요. 전 일본에서 왔어요. 당신은 어느 나라에서 왔나요?”
“저는 대한민국에서 왔어요. 혹시 사진작가신가요? 카메라가 많네요.”
“아마추어예요. 전문 작가는 아니고요.”
유람선에서 만난 일본인 그녀는 인스타그램에 올린 사진을 보여줬습니다. 주로 야경사진을 올렸습니다. 아마추어라고 하기엔 뛰어난 실력이었습니다. 팔로워도 많았고요. 바토 파리지앵에서 봐야 할 파리 야경은 제대로 못 보고, 그녀의 눈으로 본 세상만 마음에 담았습니다.
더 많은 대화를 하고 싶었지만 영어 실력이 부족해 이어나가지 못했습니다. 제2외국어로 ‘일본어’를 배웠음에도 말 한마디 못했습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다른 공부는 다 제쳐두고 일본어만 독파할 걸 그랬습니다. 침묵이 찾아오자 그녀는 카메라로 야경을 찍기 시작했습니다. 저도 그동안 못 찍었던 사진을 찍었습니다. 우리는 퐁네프 다리를 지나고 있었습니다.
이윽고 에펠탑이 가까워졌습니다. 이젠 내려야 하는 시간이 다가왔다는 것이죠. 배가 선착장에 이르렀고 사람들이 하나 둘 일어났습니다. 그녀도 야경을 담았던 카메라를 정리했습니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고민하던 저는 그녀에게 용기 내어 말했습니다.
“사요나라”
처음 던진 일본말에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bye.”
온갖 말을 떠올렸습니다. 고작 나온 말이 “잘 가요.”였습니다. 짐을 챙겨든 그녀는 짧은 눈인사를 남기고 사람들 틈으로 사라졌습니다. 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만 봤습니다.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인스타그램 아이디라도 물어볼걸 그랬습니다. 선착장 위 에펠탑을 올려다봤습니다. 야경 투어를 다녀오기 전 보다 훨씬 진해져 있었습니다. 센강을 물들인 야경과 추억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