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가까운 식당에 들어갔습니다. 점심때가 지난 시간이라 식당은 한산했지만 뱃속은 배고픔으로 가득 차있었습니다. 베네치아 야경투어를 앞두고 있습니다. 낮에 봤던 알록달록 부라노 섬에 이어 저녁엔 반짝반짝 베네치아 야경입니다. 이곳에서 메인 메뉴부터 시작해 디저트까지 먹을 겁니다. 기쁜 마음으로 식사를 시작했습니다.
베네치아의 별미 오징어 먹물 파스타, 바다의 풍미를 느낄 수 있는 랍스터 파스타, 살이 너무 부드러워 입안에서 녹아내린 농어 그리고 쫄깃한 식감이 일품인 이름 모를 면 요리까지 모든 게 대박이었습니다. 해산물과 잘 어울리는 화이트와인까지 곁들여 환상적인 점심을 먹었습니다. 수제 티라미수와 달콤한 아이스크림으로 디저트까지 완벽했습니다. 정신을 놓고 먹다 보니 어느덧 투어시간이 다가왔습니다.
현지 가이드님을 만나 인사를 나누고 아름다운 석양 스팟으로 출발했습니다. 모인 사람들끼리 ‘야경 원정대’라는 애칭을 만들고 베네치아 골목을 누볐습니다. 거리를 걸어가며 설렘과 두근거림이 점점 커졌습니다. 마치 작은 모험이 시작되는 것 같았습니다. 원정대가 처음 점령한 곳은 ‘폰다코 데이 테데스키 백화점’ 전망대입니다. 석양이 보드랍게 내려앉은 베네치아 모습은 한 폭의 예술 작품이었습니다. 카메라 촬영 버튼을 연신 눌러봤지만, 아름다움을 담기엔 부족했습니다. 불길이 번지는 듯한 절정의 색감은 어떤 과학으로도 담을 수 없었고, 어떤 단어로도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그저 멍하니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리알토 다리’는 환상의 세계를 이어주는 다리처럼 보였습니다. 물 위에 우아하게 떠있는 다리 위로 노을이 물든 모습은 몽환적이다 못해 다른 세상에 온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다리 아래엔 수상 버스가 미끄러지듯 지나다녔고 다리 위에선 사람들이 그 모습을 바라봤습니다. 저 멀리에선 노을이 사람들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눈이 닿는 모든 곳이 낭만적이고 아름다웠습니다.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전망대 퇴장 시간을 알리는 직원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붉게 물든 하늘과 운하를 마지막으로 바라보고 감동을 마무리했습니다.
다음으로 간 곳은 베네치아 대운하 끝에 위치한 다리. ‘아카데미아 다리’입니다. 많은 사진작가들이 욕심내는 장소라고 해요. 엽서사진, 스냅촬영 등 프레임만 들이대면 인생샷을 건질 수 있는 곳입니다. 다리 위에서 바라본 풍경이 감동적이었습니다. 운하가 끝나고 넓은 바다가 펼쳐지는 길목입니다. 바다로 나가는 사람들의 안녕을 기원하 듯 ‘산타 마리아 델라 살루테 성당’이 끝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발갛게 물든 노을을 향해 나아가는 배의 뒷모습이 이상하게 마음을 찡하게 했습니다.
아카데미아 다리 앞에 모여 가이드님께 베네치아 역사를 들었습니다. 베네치아는 원래 늪지대였습니다. 로마 제국 몰락으로 외세 침략을 받자 사람들은 베네치아로 피난을 갑니다. 그곳에 나무를 박아서 지반을 튼튼하게 하고, 그 위에 돌을 올려 기반을 세웠습니다. 이후 천년이 넘는 시간을 거쳐 지금의 고래 모양 베네치아가 만들어졌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며, 베네치아에 정착한 사람과 여행을 떠난 저의 모습이 닮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직장생활을 하며 가끔 너무나 절망적이어서 위안을 생각할 수 없는 막막한 상황에 부딪히기도 했습니다. 실적압박, 상사와의 불화 등 전쟁 같은 직장생활을 도망쳐 유럽여행을 시작했고요. 덕분에 아카데미아 다리에서 베네치아 야경을 즐기고 있습니다.
붉은 석양은 사그라들고 어느새 어둠이 내려앉았습니다. 건물에 하나 둘 불이 켜졌고 운하는 불빛을 머금었습니다. 다음 목적지는 ‘산 조르지오 섬’입니다. 수상 버스에 앉아 풍경을 감상했습니다. 바다에 비친 불빛이 파도에 일렁이며 반짝였습니다. 은하수를 건너가는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눈을 감고 파도소리를 들었습니다. 귀에 닿는 물결 소리가 평화를 가져다주었습니다.
어둠에 싸인 조르지오 섬은 고요하고 신비로웠습니다. 눈길을 사로잡는 ‘산 조르조 마조레 성당’의 고혹적인 모습과 차분한 분위기는 밤바다 감성을 더욱 극대화시켰습니다. 선착장 앞에서 건너편을 바라봤습니다. 황금빛 ‘두칼레 궁전’을 중심으로 넓게 깔린 조명은 도시 전체를 물들였습니다. 어둠을 뚫고 반짝이는 야경, 바다에 스며든 불빛은 야경투어를 환상적으로 만들었습니다.
역시 와인이 빠지면 안 됩니다. 야경을 보며 마신 와인은 ‘벨리니’입니다. 부산에선 광안대교를 바라보며 소주를 마셨습니다. 베네치아에서 야경을 보며 와인을 마시고 있다니 기분이 남달랐습니다. 살랑이는 바람과 일렁이는 파도가 아름다움과 경이로움을 전해주었습니다. 갑자기 눈물이 왈칵 솟구쳤습니다. 술에 취한 건지, 분위기에 취한 건지 아니면 갱년기가 온 건지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이 볼까 봐 흐르는 눈물을 몰래 닦았습니다. 그간 힘들고 버거웠던 순간이 떠올라서였습니다. 야경을 바라보며 다짐했습니다. 다시는 흔들리지 않고 상처받지 않기로요. 직장생활에 지쳐 닫아버렸던 마음의 문을 열었습니다. 아름다움 앞에서 모든 것이 치유되는 느낌이었습니다.
마음을 다잡고 배에 올랐습니다. 다행히 우는 모습을 아무도 못 본 것 같습니다. 조르지오 섬에서 바라봤던 야경 품으로 들어왔습니다. 배가 다다른 곳은 ‘탄식의 다리’입니다. 어둠은 더욱 진해져 야경을 더욱 돋보이게 만들었습니다. 이곳은 과연 어떤 아름다움이 숨어있을까요?
탄식의 다리로 걸어가며 주변을 둘러봤습니다. 줄지어 서있는 가로등이 다리를 아름답게 비추고 있었습니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예술 작품을 감상하듯 경이로움과 아낌없는 찬사를 쏟아냈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죄수가 감옥으로 들어가기 전 마지막으로 보는 외부 풍경이 탄식의 다리라고 합니다. 슬픔과 탄식의 장소에서 이색적인 풍경과 아름다움을 만끽했습니다. 행복과 아름다움을 오래 느낄 수 있도록 죄짓지 않고 착하게 살아야겠습니다.
두칼레 궁전을 지나자 높은 종탑이 나타났습니다. 베네치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인 ‘산마르코 종탑’이 야경 원정대를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어둠 사이를 가로질러 우뚝 솟은 모습은 드넓은 ‘산마르코 광장’을 지키는 수호신 같았습니다.
완연한 밤을 맞은 산마르코 광장은 황금빛으로 물들어있었습니다. 광장을 ‘ㄷ’ 자로 둘러싸고 있는 건물은 아름다운 불빛을 쏟아내며 광장을 비추었습니다. 하늘에서 떨어진 별을 받아 들고 광장을 물들이는 듯한 환상적인 모습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산마르코 광장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응접실’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환상적인 공간을 수식하기에 이보다 더 적절한 표현은 없는 것 같습니다.
광장 가운데 서서 주변을 빙 둘러봤습니다. 건물에 걸린 조명은 악보 위 음표처럼 보였습니다. 불빛을 따라 연주하면 아름다운 선율이 광장을 채울 것 같습니다. 그 자리에 앉아 건물을 올려다보았습니다. 시선이 낮아지자 밤하늘에 걸린 별처럼 아름다웠습니다. 건물에 맺힌 불빛이 와르르 쏟아져 광장을 가득 채울 듯했습니다. 그때 제 뒤로 경찰이 다가왔습니다. 무슨 일인가 했더니 광장 바닥에 앉으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하마터면 탄식의 다리를 지날 뻔했네요.
베네치아 야경투어는 감상에 그치지 않고 앞으로의 인생을 다짐하는 뜻깊은 시간이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머무를 수 있는 산 마르코 광장 같은 넓은 마음을 가지기로 했고, 대운하를 연결하는 아카데미아 다리처럼 역경을 뛰어넘는 멋진 사람이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어둠 속에서 더욱 빛나는 베네치아의 야경처럼 어려움 속에서 빛을 잃지 않는 삶을 살겠습니다. 늪지대였던 제 마음에 나무 말뚝 하나를 심으며 무한한 감동을 마무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