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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소장 Jun 02. 2024

모든 출구는 어디론가 들어가는 입구다

‘모든 출구는 어디론가 들어가는 입구다’


이 문구가 참 좋다. 얼마 전 출간한 책의 프롤로그 제목으로 들어간 문구다. 지금 내 인생을 설명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글은 없는 것 같다. 출구로 나가면 모든 것이 끝날 거라 생각했다. 아니었다. 생각지 못한 일이 펼쳐졌다. 새로운 기회도 찾아왔다.


이름만 대면 알아주는 아웃도어 브랜드에 입사했다. 매출도 업계에서 알아주는 수준이었고, 온라인 마케팅 기법도 독특하여 마케터를 꿈꾸는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회사였다. 하지만 실속은 달랐다. 열심히 제품을 팔았지만 6년 연속 억대 적자였다. 퇴사하던 해는 70억 원의 적자를 기록했다. 결국 사옥을 매각했고, 그 돈으로 부채를 갚아나갔다. 월급이 밀릴 수도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는 퇴사를 결심했다. 내가 퇴사하고 두 달 뒤, 정말 그 회사는 직원 월급을 제때 주지 못하는 회사가 되었다.

침몰해 가는 회사를 벗어나 향한 곳은 제2 금융권이었다. 생각지 못한 분야였다. 금융 자격증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관련 활동을 해온 것도 아니었다. 대학에서 광고 홍보를 전공하여 광고대행사 인턴 1년, 아웃도어 브랜드 마케팅 2년 경력. 금융업과는 완전 다른 길을 걸었다.


입사한 부서는 경영기획팀이었다. 이곳에서 나는 회사의 마케팅을 담당했다. 회사는 마케팅 인력을 구하고 있었고, 마침 마케팅 경력을 가진 내가 지원하게 된 것이다. 시기가 정말 잘 맞았다. 정말 운이 좋았던 건, 인사 담당자와 경영진이 내가 다녔던 아웃도어 브랜드의 고객이었다. 월급이 밀리고 미래가 없던 회사였지만, 그 경험 덕분에 이직할 수 있었다. 급여도 거의 1.5배 증가했다.


이직한 회사에는 마케팅 프로세스가 전혀 없었다. 기본적인 네이버 블로그 계정도 없고,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은 말할 것도 없었다. 가장 힘들었던 건 임원진과 팀장이 마케팅 지식이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알려주면서 하면 될 거라 생각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아니, 그 사람들은 듣지 않았다. 온라인 콘텐츠보다 지하철 쉘터 광고와 버스 정류장 광고를 선호했다. 물론 효과가 좋다면야 길거리에 현수막을 걸어도 상관없다. 그러나 윗사람들이 원하는 건 온라인보다 자신들이 자주 다니는 지하철역에 회사 광고가 붙는 것이었다.

마케팅 업무로 입사했지만, 실제로는 마케팅을 전혀 하지 못했다. 대신 엑셀만 하루 종일 다뤘다. 직장인 필수 스킬인 엑셀을 서른이 넘은 나이에 배웠다. ‘나는 마케팅 업무를 하러 왔는데 이걸 왜 하는 걸까?’ 투덜대며 고객 데이터를 가공했다. 눈이 빠질 것처럼 힘들었고, 숫자에 둘러싸여 살다 보니 업무를 할 때 극도로 예민해졌다. 그때 문득 찾아온 두려움이 있었다. 온라인 마케팅과 멀어지는 것 같았다.


조바심에 휩싸여 시작한 일은 온라인 채널 운영이었다. 이 시기에 나는 유튜브, 브런치, 블로그를 시작했다. 특히 유튜브 운영에 많은 재미와 흥미를 느꼈다. 한창 유튜브로 돈을 버는 사람들이 많이 나오던 시기였다. 나도 그중 한 명이 되고 싶어서 시작했다. 쿠팡에서 3만 원짜리 마이크를 구매해 녹음을 했고, 대학 시절 잠깐 배웠던 영상 편집 기술로 콘텐츠를 만들어 나갔다. 회사 사람들 대부분이 ‘유튜브 할 거야’라고 했지만, 실제 행동으로 옮긴 사람은 나뿐이었다. 1년 정도 운영했다. 구독자가 700명이 넘었다. 10만 유튜버, 100만 유튜버가 쏟아져 나오는 것에 비하면 부끄러운 숫자다. 하지만 나는 행복했다. 남들은 하지 못한 경험이었고, 생각을 행동으로 실행했으니까.


브런치에 글도 꾸준히 썼다. 마케팅 담당이라면 회사 SNS 채널에 콘텐츠를 올려야 하는데, 마케팅 업무가 사라졌다. 나를 뽑아준 대표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콘텐츠 창작의 갈증을 개인 채널에 풀기 시작했다. 몇몇 글은 포털 메인에 노출되었다. 그 글을 읽고 다양한 플랫폼에서 연락이 왔다. 그곳에 글을 기고하며 나 자신을 마케팅하고 있었다.

‘누가 보겠냐’고 생각했지만, 누군가는 보고 있었다. 즐겨찾기 해놓고 보던 플랫폼에서 연락이 왔을 때 정말 행복했다. 자신감이 생겼다. 더 열심히 꾸준히 글을 써나갔다. 그해 나는 첫 번째 작품 <26명의 직장인을 만나다>를 출간했다. 많이 팔리지 않았다. 지인들이 몇 권 샀다. 내역을 보니 공공 도서관에서도 몇 권을 구매했다. 상관없었다. ‘작가’라는 직업을 가지게 되었으니까. 온전히 글을 쓰며 생계를 유지해 나갈 생각은 아니었다. 책을 냈다는 사실에 큰 기쁨을 느꼈다. 회사에서 채우지 못한 성취감을 내 일상에서 달성한 것도 아주 큰 성과였다.


제2 금융권에서 3년 정도 시간을 보냈다. 가장 몸값이 좋을 때가 업계 3년 차라고 한다.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이직했다. 아주 좋은 조건으로 회사를 떠나게 되었다. 많이 주는 만큼 많이 부려먹는다는 걸 이직한 회사에서 깨닫게 되었다. 매일 반복되는 야근 그리고 주말 출근. 정신병에 걸릴 것만 같았다. 잘 살아보려고, 잘 나가려고 이직했지만, 전보다 못한 삶을 살게 되자 이직 6개월 만에 퇴사해 버렸다.


처음이었다. 항상 갈 곳을 정해놓고 사직서를 던졌지만, 이번엔 갈 곳이 없었다. 시간 있을 때 여행이나 다녀오자는 생각으로 3주간 유럽 여행을 떠났다. 프랑스를 시작으로 스위스와 이탈리아를 돌아다녔다. 그곳에서 느낀 생각과 감정을 글로 남겼다. 1년 뒤 나는 <퇴사한 김에 유럽 여행>이란 책으로 세 번째 작품을 탈고했다. 가장 좋았던 기억은 여행에서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는 것이다. 가장 힘들 때 떠난 곳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 가장 좋은 사람들과 인연을 맺을 수 있었다. 항상 응원해 주고 챙겨주는 사람들이 생겨서 행복하다. 회사 다니며 사람들에게 받은 상처를 여행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치유받았다.

여행에서 돌아와 시작한 일은 ‘코딩’ 배우기였다. 회사를 다니며 단순 반복 업무가 정말 싫었다. 전날 실적, 전주 실적, 전월 실적 등 일명 노가다 작업이 많았다. 파이썬이라는 프로그래밍 언어를 알면 단 몇 초 만에 반복 작업이 끝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학원을 다니며 코딩을 배우고 틈틈이 취업 준비를 하기로 했다. 하지만 시련이 또다시 찾아왔다. 취업문을 뚫기가 너무 어려웠다. 번번이 면접에서 떨어졌다. 학원 수료 전에 취업하는 것이 목표였는데, 과정이 끝나고도 한참을 백수로 지냈다.


급하게 먹으면 체한다는 표현이 정확했다. 한방병원 네트워크 본사 홍보팀에 취업했다. 본사라면 당연히 수많은 직원이 넓은 공간에서 일할 거라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대표를 포함해 세 명이 전부였다. 면접 볼 때부터 뭔가 싸했다. 그때 멈췄어야 했는데 그럴 수 없었다. 더 이상 백수로 지내기 싫었기 때문이다.


그곳은 최악이었다. 자신이 네트워크 본사 대표라고 했지만 실질적인 대표는 네트워크 지분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지점의 원장이었다. 본사 대표는 지점 병원장들이 신경 쓰기 싫은 일 또는 더러운 일을 처리했다. 말 그대로 바지 대표였다. 가장 막막했던 일은 배울 게 없다는 것이었다. 체계도 없고 미래도 없는 곳이었다. 3개월 만에 그곳을 벗어났다.


그 회사 이후로, 회사를 고를 때 확고한 기준이 생겼다. 회사의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5인 미만 회사는 무조건 멀리하게 되었다. 바지 대표에게 당한 일을 지면에 담고 싶지만, 그때를 떠올리는 게 너무나 싫고 소중한 내 글 사이에 그 사람의 이야기를 쓰는 것이 역겹다. 이 정도로도 충분히 많은 것 같다. 그리고 어떤 상사와 함께하는지도 중요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또다시 출구를 열고 나온 나는 한 달간 좌절에 빠졌다. 길어져가는 공백기에 조바심이 났다. 그러나 또다시 성급한 선택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력서에 첨부할 포트폴리오를 보완했다. 운영했던 온라인 채널과 출간 이력, 쉬는 동안 배웠던 프로그래밍 언어 등 그동안의 내 삶을 천천히 되돌아보며 마음을 다잡았다.


며칠 뒤, 새로운 곳으로 들어가는 문이 열렸다. 내 이력서를 보고 한 회사가 면접 제의를 보내왔다. 포트폴리오가 너무 마음에 든다며 바로 다음 날 면접이 가능하냐고 물었다. 참석 의사를 전하고 면접 준비를 했다. 사실 준비랄 게 없었다. 그동안 수없이 했던 면접 덕분에 1분 자기소개는 툭 누르면 바로 나올 정도였다. 물론 많이 떨어졌지만.


내가 면접장에 앉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동안 쌓아왔던 이력 덕분이었다. 70억 적자를 기록했던 회사에서 온라인 마케터로 활약했던 경험, 투덜거리며 배웠던 엑셀 활용 능력, 마케팅 감각을 놓치기 싫어서 운영했던 개인 SNS 채널, 글쓰기 플랫폼에 발행한 글을 모아 출간했던 이력, 그리고 취업 준비하며 직업전문학교에서 배운 프로그래밍 사용 가능성. 이 모든 것을 회사에서 좋게 봐주었다. 면접관은 나에게 ‘뭘 해도 할 사람’이라고 했다. 지금껏 살며 들었던 칭찬 중 최고였다.


떨어질 거라 생각했다. 나는 적지 않은 나이다. 공백기도 길다. 커리어도 애매했다. 면접 당일 저녁, 함께하자는 연락이 왔다. 믿어지지 않았다. 인사 담당자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연거푸 전했다. 전화를 두 손으로 받쳐 들고 허리를 숙이며 전화를 끊었다. 새로운 곳으로 들어가는 한 걸음을 내디뎠다.

물론 새로운 곳에서도 분명 어려움과 고난을 만날 것이다. 하지만 확실한 건 좌절을 헤쳐나가다 보면 좋은 기회가 찾아올 것이라는 믿음이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내 인생이 그걸 증명하고 있다. 출구라고 생각했던 문은 새로운 곳으로 들어가는 입구였다. 쓸데없다고 생각했던 것들은 언젠가는 쓸모가 있었다. 치욕적인 경험은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 못되고 불량한 사람들이 지나가면 착하고 좋은 사람들이 항상 나타났다. 가끔 기분 나쁘게 하는 사람을 만나더라도, 바지 대표 같은 불량품과도 시간을 보냈는데 이 정도쯤이야 하며 가뿐하게 넘겼다. 나는 이제 출구가 무섭지 않다. 출구를 열고 나가면 어떤 새로운 입구가 앞에 있을지 기대된다.


5월 마지막 날이 지났다. 한 달의 마지막 날이 되면 기분이 묘해진다. 후회와 반성으로 새로운 달을 맞이했다. 이번엔 다르다. 되돌아보니 정말 잘 살아왔다. 그동안 너무나 고생 많았던 나 자신에게 박수를 보낸다. 누구보다 치열했고 열심히 버텨냈다. 이 길 끝에 무엇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새로운 배움과 성장의 기회가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이 그 자체로 충분히 가치 있는 나의 삶. 나는 그런 나의 모습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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