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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소장 Dec 08. 2020

줄 간격, 폰트를 지적하는 결재자

“그런 지적을 할 때 결재자 얼굴을 보면 웃음이 터져 나와요. 뭐 대단한 일을 한 것처럼 뿌듯해하거든요. 아마 자기 자신이 꼼꼼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웃기는 소리죠. ‘꼼꼼’이 아니라 ‘꼰꼰’한 꼰대일 뿐인걸요."


 회사에서 기안을 작성할 때마다 B는 한숨이 먼저 나온다고 했다. 차라리 드래곤 볼을 모으는 게 더 쉽다며 회사 생활을 천천히 내뱉었다.


 “결재 라인이 너무 복잡해요. 팀 내 책임자를 시작으로 과장, 팀장의 도장을 받아야 하고요. 다음으로는 연관 부서장을 찾아가 결재를 받아요. 비용 결제를 담당하는 총무팀장, 기안이 규정상 문제가 없는지 검토하는 준법 부서 그리고 최종 결재권자인 대표이사의 날인이 필요해요. 이게 끝이 아니에요.”

 B의 결재 과정을 들으며 이해가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 업무 하나를 처리하는데 도대체 몇 번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 걸까? 기안을 들고 이 부서, 저 부서를 누빌 모습을 상상해봤다. 세부내용은 잘 모르겠지만 너무 비효율적인 것 같았다.


 “지금 말한 사람만 해도 5명인데 아직 더 남았나요?”


 B가 언급한 결재자를 세어본 뒤 다시 물어봤다. 그는 손사래 치며 이야기했다.


 “맨 마지막엔 업무를 감시하는 감사팀 도장이 떨어지고 나서야 결재는 끝나죠. 하나의 일을 하기까지 복잡하고 무의미한 일이란 생각이 들어요. 너무 느리잖아요.”


 물론 검열이나 감사를 대비해 꼼꼼하게 해야 하는 건 백 번 옳은 일이다. 하지만 B의 힘을 빠지게 하는 순간은 도장을 찍어주는 결재자들의 피드백이었다.


 “줄 간격, 띄어쓰기, 폰트 크기를 지적하는 결재자가 있어요. 사실 대부분 그래요. 그 사람들한테는 내용은 중요하지 않아요. 결재 이후 업무 프로세스와 기대효과는 뒷전이죠. 반나절 동안 기안과 보고서를 작성했는데, 고작 한다는 이야기가 줄 간격이 틀어졌다는 둥 폰트 크기가 다르다는 둥의 피드백이 오면 기안을 던져버리고 싶어요. 운 나쁘게 두세 명의 결재를 받은 뒤 이 따위 지적을 받아 기안을 수정하잖아요? 그럼 처음부터 다시 도장을 모아야 해요.”


 B의 하소연을 들으며 생각해봤다. 그들은 왜 업무 방향이나 효과를 이야기하지 않을까? 고작 줄 간격, 띄어쓰기, 폰트 크기를 피드백이랍시고 지적했을까? 아마도 그 자리에 있는 결재자들이 아는 게 없기 때문이다. 무슨 내용인지 모르면서 도장을 찍어대는 일이 태반이며, 일이 터지면 해당 업무에서 발 빼기 바쁘다. 그러라고 많은 월급 주며 직급을 달아 준 게 아닐 텐데 말이다.

 “덕분에 한글, 워드는 잘 다뤄요. 예전엔 마우스로 했는데 지금은 단축키를 사용하고 있어요. 처음엔 일을 배우고 싶었죠. 보고서는 일의 핵심을 담은 문서잖아요? 상사들이 내용을 읽어보고 업무를 바라보는 혜안을 가르쳐 줬으면 했어요. 괜한 기대였죠. 내용도 모르고 보지도 않아요.”


 3년 차가 된 B는 포기한 것 같았다. 하루는 상무의 호출이 왔다. 기존 업무 방식과 달라졌는데 왜 이런 식으로 하냐고 소리를 질렀다. 당황한 B는 이전에 상신한 기안에 해당 내용이 있다고 말한 뒤, 상무의 도장이 찍혀있는 문서를 들이밀었다. 상무는 오히려 B를 나무랐다. 문제가 될 수 있는 부분인데 결재 당시 정확하게 설명하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B는 기안에 찍혀있는 상무의 결재 도장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상무의 트집으로 줄 간격, 폰트를 여러 번 수정한 기안이었다. 내용과 업무의 방향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런 지적을 할 때 결재자 얼굴을 보면 웃음이 터져 나와요. 뭐 대단한 일을 한 것처럼 뿌듯해하거든요. 아마 자기 자신이 꼼꼼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웃기는 소리죠. ‘꼼꼼’이 아니라 ‘꼰꼰’한 꼰대일 뿐인걸요. 상무의 정년이 얼마 안 남았어요. 조금만 더 버텨야죠.”


 유병재 작가의 <말장난>이란 책에 이런 내용이 있다. ‘상무’라는 직급으로 이행시를 지었다.

 B에게 이행시를 알려주고 싶다. 기안을 날카롭게 지적했지만 상무는 날카로움보다는 낡음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유 작가의 말처럼 무책임한 인간이다.


 B의 경험담을 들으며 나도 화가 났다.


 “그냥 가만히 있었어요? ‘당신이 확인했고 직접 도장까지 찍었잖아요’라고 알려줘야죠.”


 “그러고 싶었죠. 말대꾸하면 다음 결재받을 때 더 히스테리를 부릴 것 같아서요. 그냥 참았어요. 어쩌겠어요? 힘없는 직원 나부랭이인걸요. 도장 갑질에 당할 수밖에요.”


 더 충격적인 사실은 결재자가 없을 때였다. 한시라도 빨리 업무를 처리해야 하는 상황인데 결재자가 없으면 해당 결재는 중단된다. 계약서까지 썼고 내용도 공유된 상태지만 결재가 안 났다는 이유로 비용 처리 불가다.


 “외주 업체와 일할 때가 많아요. 업체는 입금해주면 진행하겠다고 하고, 우리는 기안 승인이 안 나서 입금을 못한다고 죠. 너무 답답해요. 처음 거래하는 업체도 아니고요. 결재자들이 5명이 되는데, 그 사람들 출장이나 휴가 일정까지 꿰뚫고 있을 수도 없고요. 처리가 늦으면 저만 욕을 먹어요.”


 “요즘 전자결재 시스템도 있는 데 사용하지 않나요?”


 B는 깊은 한 숨을 내쉬며 덧붙였다.


 “제발 썼으면 좋겠어요. 4차 산업 혁명시대가 한참 진행 중인데 그들은 활용하지도 사용할 줄도 몰라요. 사후 결재라는 융통성도 찾아볼 수 없죠. 그러신 분들이 미래산업 포럼이나 콘퍼런스는 잘 찾아다녀요.”


 “가서 뭘 하나요? 내부 시스템 개선도 못 하시는데요.”


 “회사에서 하는 거랑 똑같겠죠. 뭐, 도장 찍으러 다닐 거예요. 거기선 얼굴 도장이겠구나.”


 도장을 옥냥 손에 쥐고 도장밥을 흩날리는 사람이 실제로 존재했다. 자신이 인정받는 순간은 도장을 찍는 그 순간뿐이었다. 아는 것이 없으니 알려줄 것도 없었다. B의 결재 생활을 들으며 마음을 다잡았다. 나는 저렇게 늙지 않기로 다짐했다. 훗날 후배 직원이 결재를 올리거나 업무를 물어본다면 도움되는 피드백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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