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5년 차 선배의 모습은 4, 5년 뒤 제 모습이잖아요. 선배들은 말 그대로 내가 겪을 일을 나보다 먼저 겪은 사람들이에요. 회사에 비전이 안보이니까 조금이라도 젊을 때 좋은 곳을 찾아가는 거 아닐까요? 젊은 직원이 우르르 떠나니까 기분이 이상해요. 조바심이 생겨요.”
C는 요즘 매일 야근이다. 겨우 입사 1년밖에 안됐지만 하고 있는 업무량은 선배들 못지않다. C가 야근에 시달리는 이유는 4, 5년 차 선배들이 잇달아 퇴사했기 때문이다. 어느 회사든 이상하다. 정작 나가야 할 사람은 안 나가고 나가지 말아야 할 사람만 나간다.
“구석에 앉아서 매일 기사나 읽고 주식이나 하는 고인물들 때문에 너무 화가 나요. 선배들이 줄줄이 퇴사한 이유가 저 꼴 보기 싫어서 그런 것 같아요. 많이 받으면 많이 일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피곤에 찌든 C는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가면 갈수록 힘들어지는 업무 때문이다. 선배들이 있을 땐 보조 업무를 하거나 어려운 일이 있을 땐 물어보며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선배들이 떠나자 그 업무는 고스란히 C의 몫이 됐다. 인수인계는 위로 가지 않고 밑으로 내려간다. 4, 5년 차면 많은 업무를 담당할 시기인데 고작 1년 차 C에게 몰렸으니 매일매일이 버거운 하루였다. 한참을 멍하게 있던 C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선배들이 저랑 나이 차이도 얼마 안 났어요. 또래였거든요. 힘들 땐 같이 술 마시며 털어냈는데 이젠 그럴 수 없어서 아쉬워요. 같이 놀 사람도 없고요.”
“회사에서 업무만 하는 게 아니라 재미있게 놀 사람도 필요하죠. 업무는 할 만해요? 이제 1년 정도 지났잖아요?”
곰곰이 생각에 잠긴 C는 잠시 후 멋쩍게 대답했다.
“사실, 놀 사람은 없어도 돼요. 지금 제가 하는 일 좀 누가 덜어 가줬으면 좋겠어요. 원래 하는 일도 버거웠는데 선배들이 하는 일까지 떠안았거든요. 특히나 선배들 업무는 저 같은 신입이 하기에 너무 벅차요. 용어도 어렵고요. 연차가 좀 쌓여야 수월하게 처리할 수 있는 업무죠. 일을 끝내고 나서는 정확하게 했는지도 잘 모르겠어요.”
“선배들이 그만둘 때 인수인계 안 해줬나요? 하긴 업무 인수인계라 해봐야 종이 몇 장이 끝이죠.”
나의 말이 끝나고 나서 C와 나는 크게 웃었다. 둘 다 인수인계를 종이 몇 장으로 받은 경험이 있었다. 퇴사 통보는 한 달 정도 기간을 두고 회사에 이야기한다. 충분한 인수인계와 정리를 위해서다. 한 달이면 옆에 붙어서 같이 업무를 해보고 특이사항 체크까지 가능한 시간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한 달 전에 말하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 길면 이주, 짧으면 일주일이었다. 예전 회사에선 통보 후 안 나온 사람도 있었다. 나도 약 15일 전에 회사에 퇴사 의사를 전달했다.
“인수인계 기간이 이주 밖에 안됐어요. 하필이면 제 휴가와 겹쳐서 더 짧았죠. 최대한 따라 하려고 했는데 힘들었어요. 나머지는 선배가 인수인계서에 적어줬어요. 그거 보고 따라 하라고요.”
“당연히 잘 안됐죠?”
“에휴, 말해 뭐해요. 뜻대로 안 되죠. 근데 더 어이없는 건 업무가 늦어지거나 틀리면 다들 저한테 화를 냈어요. 선배들이 하던 일을 받은 건 저니까요. 제가 신입이던, 1년 차던 자기들 알 바 아닌 거죠. 이주도 채 안 되는 기간인데, 어떻게 완벽하게 습득할 수 있나요?”
욕먹는데 해탈한 C의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아팠다. 나와 비슷한 일을 많이 겪어서 대화 내내 많은 공감을 했다. 인수인계 에피소드 다음으로 오랜 시간 나눈 이야기는 ‘미래’였다. C는 내가 했던 고민과 똑같은 고민으로 골머리를 앓았다.
“선배들이 떠나면서 떠넘긴 일 때문에 힘든 것도 있죠. 그런데 가장 저를 괴롭히는 생각은 따로 있어요. 아, 이 회사는 미래가 없는 건가? 하는 두려움이 찾아와요.”
“두려움이요? 어떤 두려움이죠?”
나의 질문에 C가 대답했다.
“4, 5년 차 선배의 모습은 4, 5년 뒤 제 모습이잖아요. 나도 저렇게 회사를 떠날 것 같아요. 선배들은 말 그대로 내가 겪을 일을 나보다 먼저 겪은 사람들이에요. 회사에 비전이 안보이니까 조금이라도 젊을 때 좋은 곳을 찾아가는 거 아닐까요? 회사가 좋으면 40대, 50대를 이 회사에서 보냈겠죠. 젊은 직원이 우르르 떠나니까 기분이 이상해요. 조바심이 생겨요.”
“요즘 평생직장이란 말은 없죠. 예전 사람들이나 그런 게 가능했어요. 그래도 최소한 회사에 마음을 줄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런 회사 찾기가 어렵죠. 저와 같이 입사했던 동기들도 6개월쯤 지나자 이직 준비를 했어요. 죽을 때까지 일 해야 하는데 이런 곳에선 도저히 안 된다고요.”
“제가 4, 5년 뒤면 삼십 대 초반이에요. 결혼도 생각할 나이고 집도 사고 차도 장만해야 할 시기예요. 그때까지 계속 회사에 붙어있어야 하는데, 비전도 없고 소모품 취급받으면 그만둘 수 도 없잖아요. 생활비, 대출금 내야 하는데 말이죠.”
한참 이야기를 쏟아낸 C는 자기도 모르게 채용 어플을 열었다. 화장실을 가거나 쉬는 시간엔 항상 신규채용 소식과 기업 후기를 찾아본다고 했다. 선배들의 잇단 이탈에 힘들어하는 C의 모습을 보니 나까지 마음이 아팠다. 떠나는 선배들의 뒷모습에서 아쉬움보다 조바심이 생기는 현실이 너무 싫었다. 좋은 곳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나쁜 곳을 피해 가는 사람들이라 더더욱 그랬다. 떠나간 그곳은 어떨까? C의 선배들이 간 곳은 미래도 있고 비전도 있었으면 좋겠다. 긴 시간 대화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던 C가 했던 말이 글을 쓰는 지금까지도 맴돈다.
“저만 이렇게 생각하는 거 아니에요. 제 동기도 싱숭생숭하다고 해요. 제 친구도 그렇고요. 다른 곳은 어떨까요? 아마 비슷하지 않을까요? 참, 먹고살기 힘든 세상이네요. 4, 5년 뒤 제 모습은 선배들과 달랐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