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비실 갔다 왔다고 하면 불성실한 사람으로 보는데, 담배 피우고 왔다는 사람에겐 별 말을 안 해요. 탕비실은 땡땡이고, 담배는 일을 하기 위해 충전하고 온 걸로 생각하는 것 같아요. 탕비실에서 상사를 마주치면 죄짓는 기분인데, 흡연실에서 만나면 동지를 만난 기분일까요?”
만병의 근원은 회사다. 입사 4년 차에 접어든 K는 몸에 이상을 느꼈다. 증상이 유별났다. 오래 앉아있으면 다리가 저렸다. 쥐가 나는 것과 다른 느낌이었다. 다리를 펼 수 없을 만큼 심한 통증이 밀려왔다. 화장실에 앉아있을 땐 더 고통스러웠다. 힘을 주면 허리와 다리가 저릿했다. 세상에서 제일 자신 있어했던 ‘대변 보기’가 힘들어지자 K는 연차를 내고 병원에 갔다.
“대학병원에 가서 CT와 MRI를 찍었죠. 척추 4번과 5번 사이에 있는 추간판이 탈출했대요. 친근한 말로는 ‘허리 디스크’ 요. 의사 선생님께서 척추 기립근 강화 운동과 스트레칭을 자주 하라고 했어요. 회사에서 잠깐 쉴 때 할 수 있는 운동을 알려주셨죠. 그런데 회사에서 자리 비우기가 어디 쉽나요?”
회사는 학교처럼 쉬는 시간이 따로 없었다. 한 시간 일하고 다 같이 쉬면 좋으련만 눈치껏 쉬는 분위기였다. 사방이 인간 CCTV인 환경에선 엉덩이를 떼기 조차 힘들었다.서로가 서로의 감시자가 되어 모니터를 흘겨봤다. 컴퓨터에서 의도치 않게 업무와 무관한 팝업이 뜰 때면 K는 소스라치게 놀라 X를 눌러댔다. 하지만 당당히 자리를 뜨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흡연자’였다.
“밖에 자주 나가고 늦게 들어오는 선배들이 있어요. 한 시간 정도 일하다가 우르르 몰려 나가요. 다들 담배 피우러 나가는 거죠. 그 사람들이 자리를 비우면 사무실이 휑해요. 빈자리에 울리는 전화는 남은 사람들의 몫이에요. 바쁜 시간인데 전화까지 대신 받아야 하죠.”
사무실을 비운 사람들은 담배만 태우지 않았다. 담배가 없을 땐 편의점에 들린다. 커+담(커피와 담배)이란 국룰을 위해 커피와 담배를 구입한다. 카페인과 니코틴을 충전하며 옹기종기 모인다. 담배 한 대를 태우던 중 다른 한 명이 다가온다. 늦게 온 사람이 담배 불을 붙이면 밖에 있는 시간이 연장된다. 그 사람을 따라 다시 새 담배를 입에 문다. 새로운 마음으로 담배도 피우고 이야기 꽃도 핀다. 그 시간 K는 사무실에 앉아 업무를 하고 있다.
“음료수와 담배까지 손에 든 사람들은 들어올 생각을 하지 않아요. 담배가 꺼져 갈 때 즘 다른 사람이 오면 또 담배 한 대를 태우죠. 이야기가 계속된답니다. 한 시간 일하고 20분 정도 쉬다가 들어와요. 저도 자리를 비우고 허리 스트레칭하러 나가고 싶어요.”
오래 자리를 비우면 팀장의 잔소리가 날아왔다. 업무시간에 어딜 갔다 왔냐는 호통에 ‘담배’라고 말하면 팀장의 화가 수그러들었다. 팀장 또한 흡연자였다. 흡연자들끼리의 연대 의식이 있는 것 같았다. 중요한 보고서 작성도 담배가 우선이었다. 자리로 돌아온 사람들은 전보다 밝은 표정으로 업무를 시작했다.
“미안한 말이지만 담배 피우고 온 사람들의 냄새가 너무 심해요. 담배 냄새도 독한데 그 사람의 향수나 샴푸 냄새와 섞인 제3의 냄새가 만들어져요. 스쳐 지나가기만 해도 후각 세포가 몰살당하는 느낌이랄까요? 가장 힘든 건 방금 담배 피우고 온 상사에게 결재받으러 갔을 때에요. 내용을 묻는 상사 얼굴에 토를 뿜을 뻔했어요. 커피와 담배가 결합한 냄새는 생화학 무기죠. 맡아본 사람은 다 알 거예요.”
K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 냄새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속이 울렁거리는 것 같았다. 한동안 골초 선배와 붙어 앉아 일했던 경험이 있는 나도 맞장구쳤다.
“맞아요. 본인들도 그 냄새를 알 텐데 말이죠. 왜 담배를 안 끊을까요?”
흡연자에게 담배는 니코틴 충전 그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매개체 역할도 했다. K와 친한 동기가 어느 날 타 부서 선배를 사석에서 '형님'이라 불렀다. 듣기 힘든 호칭을 접한 K는 동기에게 둘의 관계를 물었다. 동기와 선배는 담배 피우다가 친해졌다. 그 짧은 시간에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나중엔 술자리를 함께하는 사이가 되었다.
“담배 몇 번 폈는데 친해졌대요. 사실 동기가 그 선배 욕을 많이 했거든요. '형님, 동생'이라뇨. 깜짝 놀랐어요. 담배는 인맥도 넓혀주고 쉬는 시간도 보장해주네요. 이래서 사람들이 담배를 못 끊는 건가요?”
K가 정신을 차려보면 어느덧 두 시간이 흘러있었다. 쉬지 않고 일했더니 좀이 쑤시고 허리도 아팠다. 머리도 식힐 겸 회사 탕비실로 향했다. K는 찌부등한 몸을 스트레칭으로 풀었고 소파에 앉아 잠깐 휴식을 가졌다. 5분도 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탕비실 문을 열고 소속 팀장이 들어왔다. 반쯤 드러누워 상사를 맞이하자 기분이 이상했다. 마치 잘못을 저지른 것 같았다. 편히 쉬라는 말을 들었지만 팀장의 뒷모습은 싸늘했다.
“탕비실 갔다 왔다고 하면 불성실한 사람으로 보는데, 담배 피우고 왔다는 사람에겐 별 말을 안 해요. 탕비실은 땡땡이고, 담배는 일을 하기 위해 충전하고 온 걸로 생각하는 것 같아요. 탕비실에서 상사를 마주치면 죄짓는 기분인데, 흡연실에서 만나면 동지를 만난 기분일까요? 비흡연자라 그 마음을 모르겠네요. 일하다 쉬는 건 마찬가지인데 말이죠.”
결국 K는 자신만의 루틴을 만들었다. 오전 11시, 오후 3시가 되면 하던 일을 멈추고 밖으로 나간다. 탕비실은 사람들 눈치 때문에 되도록 피했다. 1층 외부 테라스에 앉아 굳은 어깨와 뻐근한 허리를 두드렸다. 스트레칭도 하고 멍 때리며 약 15분 정도 회사 밖에 머물렀다. 음료수는 탕비실에서 챙겨 왔다. 자판기가 있지만 회사 돈을 조금이라도 더 쓰기 위해 지갑을 아껴뒀다.
“담배 피우는 사람은 자주 나가는데 가만히 앉아있으니까 억울했어요. 허리도 아프고요. 누군가 뭐라고 하면 '난 담배를 안 피우니까 쉴 시간이 없다'라고 쏘아붙이려고요. 아직까지 자리를 비웠다고 뭐라 하는 사람은 없어요.”
“담배를 네 번 피러 가면 거의 한 시간 정도 자리를 비우는 거네요. 억울할만해요. 쉬는 시간은 각자 챙겨야죠.”
K와 나는 비흡연자들만의 공감을 했다.
K의 회사에서 새해만 되면 하는 이벤트가 있었다. 직원들 건강을 지키기 위한 '금연 프로젝트'가 열렸다. 보건소 사람들이 회사에 찾아와 흡연자의 폐 상태를 체크해주고 가글과 금연 사탕을 나눠줬다. 회사에선 일정기간 금연을 성공한 직원에게 문화상품권을 증정했다. 대부분의 사람은 중도포기 했지만 몇몇 직원은 문화상품권을 받아갔다. 아쉽게도 '비흡연자'를 위한 행사는 없었다. 애초에 담배를 안 핀 사람들은 참여도 못하고 문화상품권도 받지 못했다. 다이어트나 경비 줄이기 등 모두가 참여 가능한 이벤트는 생각지도 않았다. K는 아픈 허리를 두드리고 자세를 바로 잡은 뒤 말했다.
“담배 피우는 사람들이 나쁘다는 건 절대 아니에요. 다만 회사 분위기가 흡연자에게는 뭔가 관대한 느낌이 들어요. 윗분들이 담배를 많이 펴서 그런 건지 비흡연자들은 소외되는 느낌이 드네요. 눈치 보지 않고 담배 피우러 나가고 흡연실에서 편하게 쉬는 모습을 보면 이런 생각이 들어요. '나도 회사에서 담배를 피워볼까?'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