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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담스누피 May 09. 2023

스스로가 작게 느껴질 때

꼬마종지/글 아사노마스미 그림 요시무라 메구

한 때 잠깐 출판사에서 주최하는 그림책 작가 입문 수업을 들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 수강생들에게 서평을 남겨달라고 선물을 받았던 그림책이 [꼬마종지] 다. 불과 2년 전이지만, 지금 이곳에 옮기려고 다시 퇴고를 하다 보니 그때 내가 느꼈던 것과 지금 내가 느끼는 바가 조금 달라진 것 같다. 마흔이 된 올해.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적어본다.


책 이야기
다다 씨의 찬장에는 그릇 가족이 있다. 백화점에 진열되어 있던 꼬마 종지가 다다 씨네 찬장에 새 가족으로 오고 나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찬장 속 그릇들은 자신에게 담기는 다다 씨의 맛있는 요리를 맛보는 게 즐거움이다. 다다 씨의 맛있는 요리를 맛보고 즐거워하는 그릇들을 보며 꼬마종지는 기대감에 부푼다. "내 차례는 언제쯤일까?" 오랜 기다림 끝에 다다 씨의 선택을 받았지만 꼬마종지에는 짜디 짠 간장에 매운 고추냉이가 담겼다. 이어서 많은 요리들 곁에서 식초와 고추기름, 겨자, 매운 불고기 양념, 시큼한 케첩까지 각종 짠맛 쓴맛 매운맛만 느끼게 된 꼬마종지는 영영 맛있는 음식을 맛볼 수 없을 거란 절망과 슬픔에 사무쳤다. 그러던 어느 날, 다다 씨에게 부인 삐삐씨가 생겼다. 다들 삐삐씨의 음식 맛을 볼 기대에 잔뜩 부풀어 있을 때, 꼬마 종지는 삐삐씨의 선택을 받게 된다. 그리고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나는 언제쯤 맛있는 음식을 맛볼 수 있을까요?"
인생은 쓰다


크고 멋진 그릇들은 다다 씨의 온갖 요리를 맛보며 인생의 즐거운 맛을 느끼며 산다. 하지만 태생부터 작았던 꼬마 종지는 늘 맵거나, 짜거나, 시큼한 소스의 맛만 경험할 뿐이었다. 늘 맛있는 요리와 함께이지만, 단 한 번도 그 맛있는 요리를 맛보진 못한다.

맵고 짠 소스만 맛보는 꼬마종지는 영영 맛있는 음식을 먹지 못할까 좌절한다.

이런 그릇들의 이야기가 꼭 금수저 흙수저로 대비되는 삶의 모습과 오버랩된다. 애초부터 크고 쓰임새가 많아 다양한 요리를 맛보는 그릇은 금수저, 음식을 담기엔 너무 작게 만들어진 꼬마 종지는 흙수저 같다. 태생이 종지인지라 음식은 넘볼 수가 없었던 꼬마 종지는 절망한다. 심지어 다른 그릇들로부터 '넌 너무 작아서 양념밖에 담을 수가 없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영영 맛있는 음식을 맛볼 수 없을 거라 좌절하는 꼬마 종지에게 국그릇 어르신이 말한다.


"인생은 길단다. 정해진 것은 아무것도 없어.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더 기다려 보자꾸나."


살면서 사는 게 쉽고 즐겁기만 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을까? 외모, 스펙, 재력, 건강, 능력과 기질 다양한 분야에서 자신만의 한계를 느끼며 살아간다. 온몸으로 맵고, 짜고, 신 맛을 견디는 꼬마 종지처럼, 초라해 보이는 자신의 처지 앞에서 마음이 저릿할 때가 많다.


나는 특출 난 재능도 없고, 특별히 사회성이 좋은 것도 아니었고, 미모가 출중하지도 않았던 난 언제나 눈에 띄지 않는 학생이었다. 있어도 없는 것처럼 존재감 없이 사는 것이 당연한 듯 습관처럼 굳어지다 보니 없으면 없는 대로, 있으면 있는 대로 큰 욕심도 야망도 없이 적당히 만족하며 지금까지 살아오던 나였다. 그게 좋아서라기보다는 실패에 적응하는 나만의 방식이었다.

국그릇 어르신이 꼬마종지를 위로한다. “인생은 길단다”


나이가 들어 40살이 되고 나니, 그런 방식으로 내세울 것 없이 살아온 지금의 삶이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이른 나이에 성공이란 타이틀을 거머쥔 사람들이 어찌나 많은지. 그런 사람들과 비교해 엄마로서도, 직장인으로서도, 아내로서도 별 볼일 없는 사람임을 자각하게 되는 요즘. 어린 시절 몰래 맛봤던 아빠의 소주처럼 종종 가슴이 아리다. 그런 나에게 국그릇 어르신의 한 마디로 지금의 내가 끝이 아니라는 작은 희망을 품어본다.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어차피 난 간장 종지인걸요"
체념하고 무기력한 상태


다다 씨의 집에 새 가족이 생겼다. 삐삐씨라는 부인이 생겼다. 새로운 사람이 가져올 새 요리에 대한 기대감으로 가득한 분위기 속에서도 꼬마 종지만은 여전히 슬픔에 차있다. 아마도 반복되는 실망감과 자격지심으로 "더 나은 다음 순간"을 기대할 수 없었던 것 같다.

어차피 난 간장 종지인걸요. 꼬마종지는 풀이 죽었다.


어릴 때 난 내가 잘못 태어났다는 생각을 했다. 만약 지금 죽어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는 절대 태어나지 않으리라 했다. 그 생각의 저변엔 나의 타고난 기질적 한계를 억지로 바꾸려고 했던 부모님의 영향이 컸다는 것을 성인이 되고 나서야 알았다.

"ㅇㅎ 좀 봐봐", "ㅅㅎ처럼 좀 해봐", "ㅁㄱ 오빠 말 좀 들어봐"라는 말을 부모님으로부터 들을 때마다 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가지지 못하는 능력, 바꿀 수 없는 기질적 한계 앞에서 쓸모없는 존재로 스스로를 낙인찍고 성장하기를 포기했다.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지 않는 이상, 지금의 난 어차피 안된다'가 내 삶의 기저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내 안의 가능성을 보지 못한 채 야망 없는 삶을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사람마다 타고난 기질, 타고난 능력이 다 다른데 그 타고남을 스스로 거부하거나, 다른 이에 의해 치부당하면 "어차피 난 안돼"라고 체념하게 된다. 타고난 기질과 환경을 바꿔야 한다는 관점과 시도가 학습된 무기력에 빠지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이 작은 그릇이 좋겠어"
쓰임에 맞게 살기



삐삐씨를 만나게 되면서 꼬마종지는 간장종지에서 맛보기 그릇으로 그 쓰임이 바뀌었고, 드디어 맛있는 음식을 경험을 한다. 이 그림책의 결말이 더욱 마음에 드는 첫 번 째는 꼬마종지가 스스로를 바꾸려고 노력하지 않고도 자신의 모습 그대로 선택받아 쓰였다는 것이고, 두 번 째는 그릇들이 꼬마종지의 이런 결말을 축하해 주거나 부러워하지 않고 모두가 자기의 모습 그대로 각각에 쓰임에 맞는 존재로서 결말을 맺는다는 것이다.

맛보기 그릇이라는 용도로 쓰이게 된 꼬마종지

꼭 단점과 한계를 극복해야만 의미 있는 것일까? 왜 주어진 모습 그대로 충분히 인정받고 가치 있게 여김 받지 못하는 것일까. 왜 어릴 적 나의 부모님은 그토록 나를 바꾸고 싶어 하셨을까.

내가 대학생이 되어 우연히 기독교 동아리활동을 하면서 MBTI, 애니어그램 같은 기질분석을 통해 나의 기질적 특성을 이해하는 계기가 있었다. 그렇게 내가 쓸모없는 실패작이 아니라 그저 나의 모습 그대로 이 땅에서 가치 있는 일을 하며 살아갈 수 있음을 알았다.

'다른 그릇이 되어야 한다'는 부모의 말이 아닌 나의 그릇을 더욱 가치 있게 사용하는 법을 찾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에게 "나로서 살아가기"위한 뒤늦은 사춘기가 시작되었다. 우리에게 사춘기란 그런 시기가 아닐까. 반항이 아닌 '이 세상에서의 나의 적당한 쓰임을 찾는 과정' 그 과정이 지나면 맵고, 짜고, 시큼한 순간도 견딜 수 있지 않을까.


요즘 난 유난히 첫째 아이에게 화를 자주 낸다. 어릴 때의 내 모습을 첫째에게서 많이 보는 탓이다.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하는 생각에 이제 8살인 첫째 아이를 자주 다그친다. 나의 부모가 그랬던 것처럼, 나 역시도 나와 내 아이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게 40살이라는 인생의 새로운 길목에서 나는 아이와 함께 두 번째 사춘기를 맞이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To. 차니주니
인생은 초콜릿 상자 같다는 말을 누가 했었지. 어떤 것은 쓴 맛이 나고, 어떤 것은 달콤하지. 살면서 언제나 행복한 일만 계속되지 않아. 내가 선택한 초콜릿이 계속 쓴 맛일 뿐이라고 해서 좌절할 필요는 없어. 인생은 길고 정해진 것은 없어. 시대는 변하고 사람들도 변하지만 네 가치는 변하지 않아. 누군가는 너를 무시할 수도 있고, 우습게 볼 수도 있어. 때론 부모인 엄마아빠조차도 너희에게 실수를 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사람들의 시선이 너의 전부가 아니야. 너는 누구보다 가치 있게 지어졌고, 빛나는 존재야. 네 스스로가 꼬마 종지처럼 작아 보인다고 해서 주눅 들 필요도 없어. 물론 네가 커다란 접시처럼 보인다고 해서 으스댈 필요는 더더욱 없지. 다만 너희의 모습 그대로 너희의 인생이 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게 쓰이는 일에 힘쓰며 살아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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