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담스누피 Jul 11. 2023

그동안 나, 살아내느라 참 힘들었겠구나

[나로 살기] 마흔 살에 처음 찾은 정신건강의학과

나는 불량품이다.


어릴 때부터 난 서투른 아이였다. 두드러지게 잘하는 것이 없는 아이. 상냥하거나 싹싹하지 못했고 열심히는 하지만 눈치는 없었다. 잘 울고 신경질 적이었고 소심했다. 그런 나를 주변 어른들은 예뻐할 리가 만무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 많이 없기도 하지만 몇 개 되지 않는 기억 중에서 행복했던 기억은 없다. 기억 속의 난 늘 울었고, 혼났고, 놀림받았다. 그렇게 아주 어릴 때부터 우울이 내 삶에 찾아왔다.


유년기 시절에 난 죽어서 다시 태어나는 것을 상상하곤 했다. 교회에서는 죽어서 천국을 간다고 하는데 아니, 그보다 난 완벽한 나로 다시 태어나고 싶었다. 천국이 아닌 죽었다 다시 태어나게 해 달라는 기도를 했다.


어느 날엔 엄마에게 혼나서 집 밖으로 쫓겨 나와 집 앞의 6차선 도로를 보며 뛰어들면 어떨까?를 생각했던 초등학교 때의 기억이 생생하다.


스스로를 한심하게 여기며 미워하던 난 무엇이든 자신이 없었다. 남들은 쉽게 하는 것들이 난 왜 어려운 건지. 난 어딘가 단단히 고장 난 채 태어난 불량인간 같았다.


남들처럼 잘하고 싶어서 공부도 열심히 했지만, 잘한다는 말을 들은 적은 없었다. 상위권에 진입하고 싶어 밤도 새우고 열심히는 한 것 같은데도 성적은 늘 중간이었다. 어중간한 성적으로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던 어중간한 대학을 갔다.


그러다 보니 연애도 제대로 못했다.
"나를 좋아해 줄 사람은 없어"라는 생각은 누군가에게 다가가지도 못하게 했을 뿐 아니라, 다가오는 사람들에게도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었으니까.

머릿속으로 애절한 드라마를 수백 번 그려만 볼 뿐 고백 한 번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수년 동안 바라만 보다가 내 사랑은 끝이 나곤 했다.


인정받지 못해 서로에게 불만이 가득한 채 서먹해진 부모님과의 어색한 관계도 나에겐 불효녀라는 낙인과 수치심, 자책감을 안겨주었다.


그렇게 유년기부터 지금까지 우울은 그림자 같이 나를 감싸는 내 존재이자 내 일부가 되었다.


산후우울증 VS 육아우울증 VS 만성우울증


본래부터 우울했던 나는 첫째 아이를 낳고 산후우울증이 찾아올까 봐 두려웠다. '여기서 산후 우울증까지 겹치면 아이도 나도 끝장이다.'라고 생각했다. 정신줄 잡고 긴장한  탓인지, 남편이 적극적으로 도와주어서인지, 아니면 내가 망각한 것인지, 우울할 틈이 없었던 건지, 아무 일 없이 지나갔다.


물론 전혀 우울감이 없던 것은 아니다. "왜 나는 이것밖에 안 되는 엄마인가. 나에게 모성애가 있긴 한가. “라는 자괴감은 순간순간 나를 나락으로 떨어뜨렸지만, "내 아이와 나는 나와 엄마 같은 관계가 되게 하지 않겠다"는 의지로 버텼다.


2년 뒤 둘째가 태어나고 본격적인 육아우울증이 찾아왔다. 아무도 나를 아이들의 엄마로 인정하지 않는 것 같았다. 다른 가치관, 다른 삶의 방식, 나의 부주의함과 미숙한 판단력으로 인한 시댁 식구들의 말 한마디, 남편의 말 한마디가 비수가 되어 꽂혔다.


나의 말을 거부하고 떼쓰기 시작한 첫째 아이마저 나를 엄마로 인정하지 않는 것 같았다. 가족들로부터 유기될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찾아왔다. 내가 너무 못나서 아이를 빼앗길 것 같았고, 아빠 품에 할머니 품에 안겨있는 아이가 점점 미워졌다.


더는 안될 것 같아서 큰 맘을 먹고 상담센터를 찾았다. 아이와의 관계, 부모와의 관계, 시댁과의 관계, 남편과의 관계를 몽땅 헤집어놨지만 문제의 본질을 찾기도 전에 복직으로 상담을 종료해야 했다.


복직 후 정신없이 1년이 지나고, 이제는 육아가 아닌 장기적인 인생을 계획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때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은 허울뿐인 경력, 회사에서 조차 존재감 없는  현실은 또다시 "나는 실패한 인생"이라는 만성적 우울에 빠뜨렸다.


무기력함과 무능력함


여러 고민 끝에 이사를 했고, 10년 만에 처음 이직을 했다. 새로운 조직과 문화에 적응해야 했고, 그러는 동안 첫째 아이는 입학을 했다.


입학 후 잘 적응하는 줄로만 알았던 아이는 날이 갈수록 산만해졌고, 똑똑한 줄만 알았던 아이의 학업능력은 점점 떨어졌다. ADHD는 아닐까 하는 불안과 염려로 난 더 모질게 아이를 몰아붙였고 아이와 다투는 날이 많아졌다.


업무에서도 자꾸만 실수가 생겼다. 안 하던 실수는 아니었다. 이전에는 그냥 넘어갈 수 있었던 실수들이 새로운 직장에서는 용납되지 않았다. 그렇기에 잘 드러났고, 잘 고쳐지지 않는다는 것도 알게 됐다.


일의 프로세스가 뚜렷한 업무에서 누락되는 일과 실수가 잦아지면서 과장이라는 타이틀을 내놓아야 하는 건 아닌가 불안했다. 신뢰를 잃었다는 기분, 동료와 후배들에게 조차 무시당하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인생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신경 써야 할 것은 점점 많아지는 데 나는 무엇하나 제대로 신경 쓰지 못했다. 아이의 문제, 업무, 집안일, 아픈 친정엄마와 시어머니, 내 주변을 챙기는 일까지 모든 것을 감당하는 것이 버거워졌다.  이 나이 먹도록 어느 것 하나 완벽하게 해내지 못하는 내가 모지리, 똥멍충이 같았다.


점점 더 무기력해졌고, 그럴수록 아이들과 더욱 심하게 부딪히고 회사에서는 간단한 업무조차 어렵게 느껴졌다. 삶에서 "열심히 하기"를 포기했고 집안도 엉망, 남편과의 관계도 엉망이 되어가는 것 같았다.


그동안 의심하고 있던 그것. "혹시 내가 성인 ADHD는 아닐까?"라는 질문의 답을 찾고 싶어졌다.


회의나 대화 중에 다른 생각에 빠지는 것. 잦은 말실수. 방금 들었던 말도 잊고 다시 물어보는 것. 사람들 얼굴과 이름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것. 충동적인 일정관리. 일의 순서보다 즉흥적으로 생각나는 대로 일하는 것. 해야 할 일을 자주 미루고 까먹는 것. 무엇을 시작하던 서투른 마무리. 완벽을 추구하지만 단 한 번도 완벽하지 못했던 결과물들. 감정을 다스리지 못해 깨뜨린 관계들. 사소하지만 고쳐지지 않는 실수들. 길을 잃거나 물건을 잃어버리는 숱한 경험들. 부주의한 실수로 나와 아이들을 다치게 하거나 보호하지 못했던 순간들. 부주의와 게으름으로 점철되는 내 삶을 힘겹게 만들었던 그 모든 행위들의 이유를 알고 싶어졌다.


그렇게 만 38살에 처음 정신건강의학과를 찾았다.


나의 우울과 불안의 이유


처음으로 정신과 진료를 예약하고는 무서워졌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어떤 곳인지. 상담은 어떻게 하는지. 예약일이 다가올수록 마음속의 불안과 두려움이 커져갔다. 진료를 기다리던 일주일 간 예약 취소에 대한 충동을 이겨내야 했다.


진료당일 어찌나 긴장했던지 전날 아이 방에서 잠을 자다가 꿈속에서 남편에게 "넌 정신병자야"라는 말을 듣고 서럽게 울며 "나 정신병원에 보내줘!"라고 소리를 지르면서 새벽잠을 깼다.

그 바람에 아이도 덩달아 깨서 "엄마 정신병원에 왜 가?"라고 물을 정도였다.


그 새벽 나는 아이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게 될까. 나에게 정말 정신적인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정신병 진단을 받고 아이들을 영영 못 보게 되면 어쩌지. 차라리 ADHD라면 다행이다.라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방문한 병원에서 상담을 받고, CAT 검사를 받고 억제지속주의력, 분할주의력 부분에서 심한 저하 수준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마치 열이 펄펄 끓고 구토하는 아이에게 무슨 일이라도 난 건 아닐까 걱정하며 찾아간 응급실에서 "장염이네요."라는 말을 들을 때처럼 의사의 입에서 나온 ADHD라는 단어는 한 없이 가벼웠다.


의사는 내게 ADHD라는 진단명을 주었고, 나는 우울하고 불안했던 나의 인생을 ADHD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받아들였다.


예상했기 때문인지, 의사의 가벼운 진단 때문인지 큰 충격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결코 가볍지 않았다. 고장 난 것도 모른 채 불안 속에서 살아온 지난 시간들이 슬펐고, 나의 뇌가 정상이 아니라는 현실과 마흔이 다 되어서 달게 된 발달장애란 꼬리표가 창피했고, 혹시 내 아이들도 나와 같을까 안쓰러워졌다.


그래도 여러 가지 뒤섞인 감정의 끝은 후련했다. 이제야 비로소 나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되었으니까. 모지리가 아니라 잘못 살아온 인생이 아니라 뇌의 일부가 성장하지 못한 탓이니까. 고장 난 내 인생이 약으로 고쳐질 수도 있겠다는 작은 희망도 생겼다.  


살면서 처음으로 스스로를 다독여주었다.

"그동안 이해받지 못해 외롭고 홀로 견디고 싸우느라 힘들었지.

지난 38년 정상이 아니면서 정상인 것처럼 고군분투 살아내느라 애썼다. 기특하다. 나 자신."

매거진의 이전글 고작 8년 차 인생의 무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