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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휘 Dec 31. 2023

메리 크리스마스

 어제부터 저녁 모임에 입고 나갈 옷을 고르지 못하고 있다. 노란색에 오렌지 실이 조금 섞인 꽈배기 니트를 입고 나갈지, 아이보리 블라우스에 조금 두터운 회색 원피스를 입을지, 그것도 아니면 검은 일자 슬랙스에 흰 셔츠를 입을지가 고민이었다. 가만 보니 모든 옷에 딱히 위트나 유머가 없었다. 이대로라면 그냥 아무것도 안 입고 나가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마저 들었을 땐, 약속 시간까지 고작 20분밖에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의자에 걸린 머스타드색 머플러를 집어들었다.


 ‘내키는 대로 입어야지 어쩔 수 없어. 이미 늦었잖아.’


 쇼와랑은 백화점 8층 커피숍에서 만나기로 했다. 쇼와는 언제나 한결같이 맑고 웃음이 많다. 3학년 2학기 때 몇 번이나 지웠다 써서 건넨 고백 편지를 쇼와는 기억하고 있을까. 졸업을 하면 영영 헤어질 것 같아서 바보 같은 말들을 많이 쓴 게 부끄러웠는데, 답장이 오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아마 너무 많은 편지들을 받아서 나의 편지쯤은 완전히 잊어버렸을 것이다. 졸업한 지 벌써 10개월, 쇼와는 조금 더 키가 커진 느낌이다. 시험이 끝나거나 학기가 끝나고 시간 날 때마다 먼저 만나자고 연락해 오는 쇼와가 고맙기만 하다.


 ‘미도리, 좀 늦어? 나는 여기 편집숍 좀 둘러보고 있을게.’


 언제나 쇼와의 마음을 기다리는 건 내 쪽인 것 같은데, 막상 약속을 잡으면 먼저 가서 느긋하게 기다려주는 건 쇼와다. 차창 너머로 몇 번의 사거리가 지나야 백화점 맞은 편 횡단보도에 내릴 수 있다.


 백화점 정문 앞은 광장처럼 넓어서, 오래 쇼핑하다 지친 중년의 아주머니들이 쉬어 가거나 자전거를 잠깐 뉘이고 아이스크림을 먹는 아이들, 연인을 기다리며 거울을 보는 젊은 청년들이 잠시 시간을 보내기에 참 좋다. 언제나 이 곳에 벤치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작년 연말에 벤치와 쓰레기통이 여러 개 생긴 후로 이렇게 경관이 훨씬 풍성하고 깨끗해졌다. 쇼와는 체격도 좋지만 그 체격에 맞게 옷을 멋스럽게 입을 줄 안다. 오늘은 뭘 입고 나왔을까. 겨울 바람이 유독 세서 입구의 문이 무겁게 느껴졌다.


 1층 가판대는 할인 제품들로 성황이었다. 휴일이라 주부들이 많이 와서 이것저것 집어가며 가격을 묻고 있었다. 그 와중에 바닥에 떨어진 와인색 장갑 한 짝에 눈길이 갔다. 저 장갑도 누군가가 집어주길 기다리고 있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8층 버튼을 누르고 벽에 기대어 섰다. 저마다 뽐내듯 뿌린 향수 냄새가 네모난 공간을 가득 채웠다. 향수라도 뿌리고 올 걸 그랬나, 쇼와에게서는 언제나 시원한 풀 향이 난다. 같은 향수를 뿌리는 오노에게서 나는 향과는 전혀 달라서, 사람에게서 풍기는 아우라와 향이 다를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언젠가 핸드크림을 바르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봤었는데, 손이 유독 희고 보드라워 보여서 놀랐다. 쇼와는 저 흰 손으로 농구도 하고 과제도 하는 것이다. 올바른 일만 할 것 같은 손이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8층에 도착했다. 쇼와가 늘 구경하는 편집숍은 코너를 돌아 두 번째 가게다. 엘리베이터를 내려 다시 한 번 앞머리를 정돈한다. 크리스마스에 회색 코트라니 정말 위트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패션이다. 카키색 장갑을 벗어 손등의 향기를 맡아 본다. 나오기 전에 바른 로션 냄새가 아직 남아 있다. 쇼와를 만나러 가는 길은 언제나 자전거 첫 페달을 밟을 때처럼 조심스러우면서도 알 수 없는 힘이 생겨 난다. 조금 빠르게 뛰는 심장소리를 느끼며 편집숍에 들어선다. 쇼와는 이 곳에 없다.


 ‘미도리, 나 8층 에스컬레이터 옆 카페에 있어.’


 문자를 늦게 확인했다. 편집숍을 나와 에스컬레이터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맞은편에서 나를 향해 오는 유모차에 앉은 아기를 바라본다. 아기의 손도 희고 곱다. 쇼와는 아기 때 어떤 얼굴이었을까.


 '젤리무스'. 저 곳에 가면 쇼와가 날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언제나처럼 맑고 예쁜 미소를 얼굴에 범벅을 하고서. 아니나 다를까 손을 번쩍 들어 인사를 하고 있다. 얼굴을 보니 안심이 되어 마음이 마시멜로우처럼 녹아내린다.


 테이블에는 하늘색 쇼핑백이 놓여 있다. 벌써 쇼핑을 마친 것 같았다.


 "시나몬 라떼 시켜놨는데, 괜찮아?"

 "응. 고마워. 쇼핑했어?"

 “음.. 열어봐.”


 가슴이 쿵쾅대서 멈출 수가 없었다. 매 년 생일 정도는 챙기는 사이지만 이렇게 갑작스럽게 선물을 받을 줄은 몰랐다. 무엇보다 크리스마스 선물을 따로 준비하지 않아서 민망함이 앞섰다.


 “나는 아무것도 준비 못 했는데.”

 “괜찮아. 열어 봐.”


 쇼핑백 안의 청록색 박스를 살살 열어 본다. 향수와 핸드크림 세트가 포장되어 있었다. 쇼와는 뭐든 잘 고르는 친구니까 아마 나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향을 샀을 것이다. 다시 박스를 쇼핑백에 넣으려는데 하얀색 카드가 들어 있다. 쇼와는 눈썹을 치켜 올리며 별 거 아니라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조심스럽게 카드를 읽어 보았다.


 ㅡ 언제나 한결 같은 미도리,
     늘 아끼고 좋아하고 있어.

     너를 많이 웃게 해 주고 싶어.


 왈칵 쏟아질 것 같은 눈물을 간신히 참아냈다. 심장 소리가 쿵쿵 울려 먹먹했다.


 “답장이 늦었지. 나도 널 좋아해, 미도리. 메리 크리스마스.”

 “아, 메리 크리스마스.”


 붉어진 뺨으로 쇼와를 바라보았다. 쇼와는 세상에서 가장 싱그러운 모습으로 웃고 있었다.




*작가의 말


올해 크리스마스에는 친구를 집에 초대해 글짓기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저희가 정한 주제는 두 가지였는데요. 하나는 <크리스마스>를 주제로 하는 글 쓰기, 다른 하나는 "여기에 두면 될까요?"로 시작하는 글쓰기 였습니다.

연말이나 연휴에 술을 먹거나, 게임을 하거나, 각자의 고해성사를 하는 것도 좋지만 가끔 이렇게 아무 글이나 신나게 적고 서로 바꿔 읽는 것도 정말 의미 있어서 좋더라고요. (대학교 때부터 스터디 할 때 같은 주제로 글을 쓰고 서로 바꿔 읽고 질문하는 걸 진짜 좋아했어요.)

일본 소설 같은 글을 써 보고 싶다는 마음에 20분만에 써내려갔던 글을 조금 수정해 나눠봤습니다.

올 한 해도 고생하셨어요 모두.

내년엔 더 다양하고 솔직한 글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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