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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씨방 Apr 08. 2021

앉아서 하는 체험

분위기 전환 버튼

나에게는 분위기 전환 버튼이 있다. 

하나는 음악 재생 버튼. 하던 일을 멈추고 다른 일을 할 때, 주로 침대맡에서 노래를 듣는다. 포르투에 온 이후로는 아말리아 로드리게스의 ‘검은 돛배(Barco Negro)’를 듣는다. 포르투갈 전통가요인 파두(FADO)로 우리나라의 한과 비슷한 사우다지(Saudade)가 서려 있다. 듣고 있자면 그리움보다 묵직한 감정이 전해져서 붕 뜬 마음이 가라앉는다. 다른 하나는 울퉁불퉁한 파란색 컵. 아침에 일어나 이 컵에 커피를 따른다. 손가락 두 마디 높이인데 가득 따르면 양이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다. 컵을 든 채 주방에서 다시 침실로 향한다. 그리고 침대에 앉아 지난밤 흐트러뜨린 옷과 책을 본다. 눈꺼풀이 가벼워졌다. 마지막 버튼, 협탁 위 ‘잘’이라고 적힌 타일에 컵을 내려놓는다. 오늘도 잘 시작할 준비가 됐다.


파두 그리고 컵과 타일. 모두 포르투에 와서 체험 프로그램에 참여해본 일들이다. 

이전까지의 여행은 직접 찾아가서 배우기보다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는 일들을 많이 했다. 우연히 발견한 건물을 눈에 담는다거나 건물들의 공통점을 발견하고는 인터넷으로 그 이유를 찾아보는 식이었다. 여행지마다 특색 있는 체험은 많았다. 그러나 무리 지어 다니는 게 불편했고, 굳이 배우지 않아도 불편함이 전혀 없었다. 낯선 언어로 무언가를 배운다는 게 부담스러웠을 수도 있다. 포르투에서는 가능한 많이 선택해보고 싶었다. 굳이 안 해도 될 일들을 경험하면서 느낀 건, 역시나 굳이 안 해도 될 일이라는 것이다.


파두 공연은 나를 골목으로 이끌었다.

포르투에 도착한 지 이틀만이었다. 점점 인적이 드물어지는가 싶더니 아담한 성당이 눈에 들어왔다. 16세기 성당을 와인바로 단장한 곳이었다. 내부는 붉은색 페인트가 칠해져 있었는데 주홍색 조명 아래 금빛 장식이 반짝였다. 공연은 2층에서 시작됐다. 가수는 난간에 서서 먼 바다를 바라보듯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낯선 언어인데도 단어 하나하나가 들리는 것 같았다. ‘나’, ‘당신’, ‘그리움’이라는 단어들이 떠올랐다. 단어와 단어 사이, 숨을 놓는 순간도 노래의 일부였다. 공연을 보고 나오자 대로변에도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바닥에 한 발 한 발 내딛는 게 아니라 푹푹 꺼지는 느낌이었다. 집에 돌아와 음악 재생 목록에 새로운 노래를 추가했다. 


도예와 아줄레주 체험은 기다림이 필요했다. 

만든 물건을 다시 구워내는 데 며칠을 기다려야 했기 때문이다. 그중 도예 체험을 한 곳은 커다란 나무와 도예품이 어우러져 있었다. 이가 나간 그릇도 많았다. 그날은 게스트가 우리뿐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마침 놀러 온 동네 꼬마까지 셋이서 수업을 들었다. 무엇을 만들겠냐는 질문에, 나는 컵이라고 대답했다. 가장 무난해 보였다. 직접 컵의 모양과 크기를 정해보라고 했다. 내게 어떤 컵이 필요할지 몰랐다. 또 무난한 기다란 컵을 만들자 싶었는데, 회전판 돌리는 데 실패하며 몽땅한 컵이 되고 말았다. 큰 유리창으로 노을빛이 내려앉고 있었다. 몽땅 컵에도 빛이 어렸다. 이때만 해도 한참 컵 용량이 한참은 부족해 보였는데, 나중에야 이게 적당하다는 걸 알았다. 익숙해진 건지도 모른다. 보기에는 투박해도 내 이름이 새겨진, 나에게는 알맞은 컵.      


컵을 만든 다음에는 나름 자신감이 붙었다. 아줄레주 체험은 비교적 간단해 보였다. 

타일 두 개에 각각 원하는 모양의 틀을 댄 다음 색을 칠하면 된다. 포르투를 걸어 다니면 기차역과 성당, 그리고 가정집 외부에 직사각형 타일을 장식해 놓을 것을 볼 수 있다. 이를 아줄레주라고 한다. 몇몇 현지인은 아줄레주 장식에 대해 "왜 주방에 붙이는 걸 외벽에 붙이지?" 하는 반응을 보인다고. 체험이 시작됐다. 막상 색을 진하게 칠하려고 여러 번 덧대는 바람에, 타일 하나를 칠하는 데에만 한 시간 반이 걸렸다. 남은 시간은 삼십 분이었다. 결국 틀을 대고 칠하는 대신 새로 그려 넣어야 했다. '잘'이라는 글자를 새겼다. 나름 순발력을 발휘해 잘 하자는 의미를 담은 건데, 잘하지 못해 잘 하자는 의미를 담은 건 아닌가 싶다.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일들이 많다. 

안 해도 그만인 일들은 의외로 일상을 변화시킨다. 나는 분위기 전환용 노래가 생겼고, 아침을 시작하는 데 적당한 커피 양을 알았으며, 타일 위에 뭐든 올려놓으면 잘 풀릴 듯한 기분이 든다. 하루를 보내는 모습이 다양해졌다. 스스로에게 최면을 거는 기술 몇 가지 더 배운 것 같기도 하다. 또 하나, 내가 선택한 체험은 모두 앉아서 하는 일들이다. 서핑을 하거나 쇼핑을 도와주거나, 혹은 러닝을 하며 골목 구석구석을 안내해주는 체험도 있었다. 많은 일들 중에, 내가 어떤 분위기를 좋아하는지도 조금 분명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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