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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씨방 Apr 08. 2021

잠옷을 산다는 건

내려놓기

방 한편에 놓인 신발처럼 나는 언제든 나갈 준비가 돼 있었다. 

집에 와 신발을 벗고 다시 신발을 신었다. 집에서는 슬리퍼를 신었는데, 그대로 마켓에 가거나 바람을 쐬고 왔다. 천장을 보고 누우면 그날 하루 있었던 일들이 뭉글뭉글 떠올랐다. 마음이 쉬이 가라앉지 않아 뒤척였다. 한국에서의 생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일을 마치고 오면 조금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만 자야 한다'는 생각에 이부자리를 폈다. 그러다 하루가 가는 게 아쉽고 아까워서, 몸을 일으켜 편의점에 다녀왔다. 자려고 누워서는 두 번 다시 하지 않을 일들을 되새겼다.


장소와 상관없이 천장에는 여러 생각들이 그려졌다. 나는 그 생각들에 곧잘 휩쓸려 갔다. 드물게 밤을 지새웠고 자주 피곤했다. 당연한 거라고 여겼는데, 꼭 그런 건 아니었다. 


포르투에 와 산타 카타리나 거리(Rua de Santa Catarina)를 찾았다. 

빈티지와 브랜드 의류 가게가 줄지어 선 쇼핑 거리다. 한 가게에 들어서자 잠옷이 가득했다. 서울의 우리 집에도 장롱 가득 잠옷이 있다. 목이 늘어났거나 색이 바랜, 마실 옷 겸 잠옷이다. 원하지 않아도 한 계절에 두세 벌씩은 생긴다. 잠옷에 둘러싸여 있으니 마음 한편이 간지러웠다. 청소년기에 나는 30대면 누구나 '깨끗한 잠옷 차림으로 하얀 침대에서 일어나 커피 한 잔으로 산뜻하게 아침을 여는 성공한 프리랜서'가 되는 줄 알았다. 판타지 드라마다. 그래도 이곳에서 세 가지는 이룰 수 있을 것 같았다. 깨끗한 잠옷, 하얀 침대, 커피 한 잔. 침대와 커피는 갖췄다. 19.99유로를 더 주고 판타지를 살아보기로 했다. 



판타지가 일상이 되지 않는 건, 아마 번거로워서가 아닐까.

잠옷을 '잘 때만 입는 옷'으로 사용하기로 했다. 그래서 번거로워졌다. 잠옷을 입는 게 꼭 하루의 경계를 넘는 일처럼 느껴졌다. 잠에 들 준비가 되어서야 잠옷을 집어 들었다. 자연스럽게 집 밖에서 입는 외출복, 집 안에서 입는 실내복, 침대 위에서 입는 잠옷으로 나눴다. 귀찮으면 쉬이 건너뛰던 일이다. 또 전에는 어느 옷이든 잠옷이 될 수 있었는데, 진짜 잠옷을 산 후로는 구분을 하게 됐다. 볕이 좋은 날에는 일찍부터 세탁기를 돌렸다. 건조대에 잠옷을 널어두면 하루가 가볍다. 


스스로에게 최면을 거는 일 같다. 하루 동안 먹었던 음식, 스쳐간 사람, 수상한 가게에 대한 잔상을 밖에서 입던 옷과 함께 내려놓기. 그리고 새 기분, 아니 잠옷을 갖춰 입고 침대에 누워 "역시 이불속이 따뜻해" 하고 말한다. 습관적으로 밖에 나가는 일도 줄었다. 정말이지 번거로워서, 침대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졌다. 


판타지는 사실 큰 변화를 가져다주지 않는다. 단지 천장에 이런저런 그림을 그리는 대신, 침구나 잠옷의 소재 같이 직접 피부에 와 닿는 걸 느낀다. 형체가 없는 생각보다 당장 내가 만지고 느낄 수 일들이 더 중요하다는 걸 안다. 이런 당연한 사실에 조금 더 집중할 수 있다.


아침에 일어나 기지개를 켠다. 잠옷을 벗어놓고 옷 주름을 하나하나 살핀다. 밤새 많이 뒹굴었다. 다음에는 상하의가 나뉜 잠옷을 사야겠다고 다짐한다. 꾸준히 살피다 보면 이룰 수 있을 것 같다. 깨끗한 잠옷 차림으로 이부자리에서 일어나 가뿐히 아침을 맞는 30대 모 씨.


주방으로 가 커피를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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