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파리에 도착한 후 며칠이 지났을 때
생명줄 같았던 파리의 지도와, 닳아버린 지하철 노선도를 가방 깊숙이 넣어 두기로 했다.
궁금했다.
내 발길이 닿는 곳이 어딘지, 내 마음이 향하는 곳이 어딘지.
그렇게 무작정 걷던 나는,
걷지 않았다면 만나지 못했을 파리의 진짜 일상들을 만날 수 있었다.
엄마와 딸이 투닥거리다 까르르 웃어버린다거나,
사무실 가득 쌓여 있는 책들을 정리한다거나,
무언가를 디자인하고, 꽃에 물을 주고, 전화를 받는.
아주 사소한 그런 일상들.
아이스크림을 들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내 빨간 운동화가 춤을 추듯 거닐었던 길 위의 발자국들.
빛이 요술을 부리는 골목길로 들어서면 마주하는 타인의 취향들.
걷기만 해도 사랑스러운 파리의 거리들.
소박했던, 행복했던,
내가 사랑하는 파리의 지도 위 시간들이었다.
지구 반대편에 지도 없이 걸을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건 정말 낭만적인 일이다.
내게는 파리가 그렇다.
하루 종일 걸어 다니며 눈과 마음으로 익힌 파리는 이제 서울보다 좀 더 익숙한 곳이 됐다.
어쩌면 걷는다는 건,
여행을 떠나오기 까지 위태로웠던 내 감정들에 중심을 세워주는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걸으면서 생각하고 그 생각을 정리하고 때로는 결심을 때로는 단념을 하기도 했으니까.
걷는다는 건 선물 같은 일이기도 하다.
캄캄한 지하철 안에서, 휙휙 지나가는 버스 안에서 놓쳤을지 모르는 풍경들을
걸으면서 발견하는 건 여간 신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걷지 못할 길은 없고, 걷지 못할 이유는 없다.
길은 많으니 우리는 한 발자국 떼어 걸으면 되는 것이다.
가보지 않은 길 끝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 알 수 없다.
수많은 물음표를 뒤로 하고 한 발자국만 용기 내서 길 안으로 들어가 보면
의외의 어떤 것을 발견할 때가 있다.
그리고 그게 아주 제법 마음에 들 때도 있다.
마음에 들지 않아도 괜찮다.
가보지 않았다면 몰랐을 것들을 알게 됐으니까. 용기를 냈고 도전을 했으니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
길이란 그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