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에펠탑에 올라가지 않는 이유
잠시 후 샤를 드골 공항에 착륙하겠습니다
공기와 습도부터 달라진 파리에 내 두 발을 얹는 순간, 벅차오르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공항 밖으로 나오니 실크처럼 보슬보슬하게 내리는 비가 내 온몸을 감쌌다.
내가 한 달 동안 파리에서 머무를 곳은 파리의 중심가에서 30분 정도 떨어진 7호선 끝자락의 외곽 동네였다.
워낙 지하철 소매치기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 잔뜩 긴장한 탓에 헛구역질이 나서
역에 도착하자마자 주저앉아버렸다.
처음부터 쉬운 게 하나도 없다.
내 키의 절반은 될듯한 큰 여행가방을 들고 엘리베이터도 에스컬레이터도 없는
파리의 지하철 계단을 올라갔다.
몇 번이고 무거운 가방을 내던지고 싶을 때마다
지금 이 순간, 그리고 앞으로의 여행에서 문제들을 해결해야 하는 것도
나를 책임져야 하는 것은 오로지 나 자신뿐임을 되뇌었다.
삶도 그렇다. 내 곁에 누가 있던 결국 나를 책임지고 나를 지켜야 하는 건 나 자신뿐이고
누가 뭐라 하던 걸어가야 할 인생의 방향을 선택해야 하는 것 또한 결국은 나 자신뿐이다.
여행에서도 인생에서도 나침판은 내 손에 있다. 나의 지도는 나 스스로 그리는 것이다.
같은 것을 보고, 같은 길을 걷더라도 어떻게 보고 어떻게 느끼느냐는 결국,
마음의 시선에 따라 달라지는 거니까.
드디어 계단을 다 올랐을 때 내 눈 앞에 펼쳐진 건 에펠탑도 개선문도
화려한 샹젤리제 거리도 아닌 블랙커피 같은 짙은 어둠뿐이었다.
그때 구세주처럼 내 눈에 보인 건 패스트푸드점을 상징하는 M모양이 간판.
그리고 나중에 알았다.
그건 패스트푸드점의 간판이 아니라 파리의 지하철 메트로를 상징하는 표시였고,
그곳이 지하철역이라는 것을.
그 어둠을 헤치며 홀로 걷는 동안 심장이 튀어나올 만큼 쿵쾅거리고 빠르게 뛰었다.
지금은 파리의 밤거리도 겁내지 않고 돌아다니지만
(물론 밤늦게 혼자 돌아다니는 건 위험하다! 나는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다.)
그때는 어둠으로 뒤덮인 그 거리가 너무 무서웠다.
숙소 주인의 도움으로 드디어 파리의 나의 집에 도착해 따뜻한 잠자리에 누웠을 때 나는 다짐했다.
내일 날이 밝으면 에펠탑에 가장 먼저 달려가겠다고.
하루 종일 그 앞에 하염없이 앉아 있을 거라고.
내가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얼마나 이 순간을 기다려왔는지 다 쏟아내겠다고.
그리고 다음날 아침, 나는 눈을 뜨자마자 에펠탑으로 달려갔다.
잔뜩 흐린 하늘에 우뚝 솟은 에펠탑이 내게 다가오는 순간, 왈칵 눈물이 나왔다.
이 에펠탑을 보려고 나는 12시간 동안 8000km를 날아왔다.
이 에펠탑 하나만을 그리며 나는 벽으로 둘러싸인 듯 답답했던 현실을 견뎌냈다.
가까이 다가간 에펠탑은 화장을 지운 수줍은 여인의 모습과 같았다.
얽히고설킨 복잡한 구조가 마치 내 마음 같아 더 정이 갔다.
처음 에펠탑을 마주했던 그 순간과 그 벅참과 그 설렘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나는 그만큼의 감동과 벅참을 느낀 적이 없었다.
내가 간절히 원하던 작가가 됐을 때도, 내 이름이 처음으로 TV에 나왔을 때도
내 대본을 처음 출연자가 읽어주었을 때도 그 정도는 아녔다고 자부한다.
그래서 나는 이 에펠탑을 보러 매년 파리에 간다. 그리고 여전히 예쁘다.
언제나 품위와 도도함을 잃지 않는 프랑스와 닮았다.
이제는 수도 없이 본 에펠탑이지만 나는 여전히 에펠탑을 볼 때마다 울컥 눈물이 난다.
일상이 힘들 때마다 에펠탑 사진을 보면 받았던 다정한 위로가 생각나서.
늘 그 자리에 변함없이 있어 주는 게 고마워서.
많은 사람이 나에게 왜 에펠탑에 올라가지 않느냐고 물었다.
나는 에펠탑이 있는 파리가 좋아서라고 답했다.
에펠탑이 없었다면 어쩌면 파리는 나에게 그렇게 매력적이지 않을 수도 있다.
냄새나는 지하철과 개똥이 난무하는 길거리와 거리의 부랑자들, 득실대는 소매치기들을
모두 눈감아 줄 수 있는 건 오로지 에펠탑 때문이다.
삶은 때로 믿기지 않는 순간들을 선물하기도 한다.
내 인생에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던 가슴 뛰는 일들이 일어나고
거짓말처럼 내 눈 앞에 에펠탑이 펼치지는 것처럼 말이다.
여기 와서 많은 일이 있었지만 항상 에펠탑이 있었죠.
아오이 씨에게 에펠탑은 특별해요?
특별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언제나 저기 있잖아요.
사람은 어디론가 가버리니까
-영화 새 구두를 사야 해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