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지혜 Dec 03. 2018

계절을 살아내는 애틋한 위로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 

내가 파리에서 에펠탑 다음으로 가장 사랑하는 곳.

도시의 소음에서 멀어지고 싶을 때, 조용히 혼술을 하고 싶을 때, 

가끔 음악을 들으며 눈물을 흘리고 싶을 때 찾아가는 나만의 시크릿 장소.

아는 사람은 가고 모르는 사람은 절대 못 가는 비밀의 섬.


퐁뇌프 다리 하면 가장 먼저 떠오는 것이 쥘리에트 비노슈와 드니 라방이 주연한 

영화 <퐁네프의 연인들> 일 것이다. 

영화처럼 낭만적인 이곳은 내가 파리에서 좋아하는 다리 하나이다.

(내가 좋아하는 또 다른 다리는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 마지막 장면에 나왔던 

알렉산더 3세 다리. 낮에도 예쁘지만 야경이 정말 예쁘다.)  

퐁뇌프 다리 위에서 보는 에펠탑이 그리고 파리의 풍경이 정말 아름다워서 

그 풍경 속에 있다는 사실이 눈물이 날 만큼 감격스러울 정도다.


miel.may11th


그런데 내가 퐁뇌프를 좋아하는 이유는 단순히 이곳에서 바라보는 파리의 풍경이 아름다워서만은 아니다.

이곳에는 아는 사람만 아는 시크릿한 비밀의 섬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퐁네프다리 중간 즈음으로 오면 앙리 4세 동상이 있는 광장이 나온다.

그곳을 기점으로 시떼 섬이 시작된다.

보통은 동상을 등지고 길을 건너 시떼 섬으로 향하기 마련이라서 

퐁뇌프에 있는 진짜 보석을 놓치는 경우가 많다.


앙리 4세 동상 뒤편에 아주 좁은 계단이 있는데 그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작은 공원이 나타난다. 

바로 '베르갈랑 광장'이다. 


내가 가본 한 이곳은 관광지임에도 관광객들이 잘 내려오지 않아서 

공원에는 주로 유모차를 아이와 아이 엄마, 머리가 희끗한 할머니와 할아버지, 

혹은 학생들이 잔디밭에 누워 식사를 하거나 수다를 떠는 풍경들을 주로 목격할 수 있었다.


공원에 앉아 잠시 도시의 소음을 피하는 것도 좋지만 

내가 좋아하는 장소는 내 발 밑에 센강을 둘 수 있는 이 공원의 둔치이다.


이곳에 앉아 있으면 마치 다른 세상의 문을 열고 온 듯이 센강이 흐르는 고요한 소리만이 들려온다. 

해 질 녘 풍경이 정말 멋져서 혼술이 하고 싶을 때, 생각이 많아질 때, 누군가가 그리워질 때,

괜히 울고 싶을 때 이곳에 가만히 앉아 음악을 듣거나 맥주를 마신다.


그렇게 반짝이는 센강 곁에 앉아 다독거림을 받은 시간이 많았다.

일렁거림 없이 잔잔히 흐르는 센강은 이제 괜찮다고 내게 웃어주는 듯도 했다.


유람선이 지나가면 팔을 번쩍 들어 크게 손을 흔들어줄 수 있는 용기가 생기는 곳도 바로 이곳이다.

내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이기도 해서 

여행의 끝자락에 항상 이곳에 와서 여행을 마무리하기도 한다.


miel.may11th


사실 말처럼 마냥 낭만적인 곳은 아니다. 우선 바닥은 더럽고 곳곳에 깨진 술병이라든가

쥐들이 왔다 갔다 하기도 하고 가끔 술 취한 사람이 지나다니기도 한다.


그러나! 이곳에 앉아 단 한 번이라도 붉게 물들어가는 해지는 파리의 하늘을 봤다면 

그 모든 낭만적이지 않은 것들을 모른 채 있을 만큼 낭만적인 곳이 바로 이곳이다. 

'행복하다'라는 말이 저절로 나오게 하는 마법 같은 곳이다.


누군가 나에게 '지금 행복하니?'라고 물었을 때 선뜻 대답을 못했던 적이 많다.

딱히 불행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딱히 행복하지도 않은 

그냥 그런 일상들을 살아가는 일이 대부분이니까.


그런데 이곳에서는 '행복해'라는 말을 가만히 읊조리다 이내 큰소리로 말하게 된다.

나는 정말 '행복하다'라고.


단순히 여행이 주는 해방감이나 이곳에서 앉아 보는 풍경이 아름다워서만은 아니다.

여전히 여행할 수 있다는 것. 

내게 여행할 수 있는 용기가 있다는 것. 

그건 나에게 절대 행복이고 어쩌면 흔치 않은 행운이다.


여행을 떠난다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여행할 시간과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마음과 용기가 없어서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나 역시도 여행을 떠나는 게 매번 쉬운 일은 아니다. 

내가 여행을 떠나지 않으면 깨지 않아도 됐을 적금들이며 

프리랜서이기 때문에 여행을 위해 그만둬야 하는 일, 

그리고 다녀와서 다시 시작해야 할 조금은 귀찮은 구직활동.

정말 여행을 떠나도 괜찮은 걸까라는 생각 들 때가 많다.


그러나 떠나보지 않으면 알 수 없었을 것이다.

퐁뇌프 다리 아래 이렇게 멋진 비밀의 섬이 있다는 것도, 

이곳에서 바라보는 석양이 눈물 날만큼 아름답다는 것도, 

이곳에서 마시는 맥주 한잔이 두고두고 내 삶에 큰 위로가 됐을거라는 것도.

무엇보다 지구 반대편에 이토록 낭만적인 나만의 시크릿 장소가 있다는 것도 모두 모른 채 살았을테니까.


누군가는 추억은 힘이 없다고 하지만 

누군가에게 어떤 추억은 계절을 살아내는 애틋한 위로가 되기도 한다.

파리 속 나만의 비밀의 섬 처럼.


miel.may11th






이전 10화 바게트를 먹는 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