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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혜 Nov 30. 2018

바게트를 먹는 법

프랑스 하면 가장 먼저 떠올랐던 그림은 에펠탑 앞에 베레모를 쓴 여인이

종이봉투에 담긴 바게트를 한 아름 안고 있는 모습이다.


바게트는 프랑스의 상징이자 주식이자 자존심이다. 우리나라의 김치처럼 말이다.

밀가루와 물, 이스트와 소금만으로 만드는 가늘고  긴 모양의 바게트는

재료는 간단하지만 만드는 방법이 저마다 달라서 숙성이나 발효의 정도에 따라

맛과 향, 촉감까지 다르게 만들어진다.


그러고 보면 '무엇이'아니라 '어떻게'가 더 중요할 때가 있다.

학교에서 배웠던 것처럼 사회는 결과보다 과정이 아니라 '과정보다 결과'를 추구할 때가 많지만

어떤 과정을 거쳤느냐에 따라서 결과는 다르게 나타난다.

밀가루와 이스트와 소금만 넣는다고 맛있는 바게트가 만들어지는 게 아닌 것처럼.

얼마큼 맛있는 바게트가 되는지는 각자의 노력과 관심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일을 하다 보면 밤새 대본을 쓰고 또 며칠 밤을 새우면서 대본을 수정한다.

내가 하는 일은 글이 아니라 말을 쓰는 일이기 때문에 사소한 토씨 하나를

수십 번을 더 고민하고 수정하는 경우가 많다.

선배의 지휘에 따라 대본을 고칠 때마다 너무 사소한 것까지 지적하는 게 아닌가 싶을 때도 있지만

결과적으로 완성된 대본을 보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결국은 그런 과정들이 모여 장시간의 녹화를 사고 없이 마칠 수 있고

그래서 꽤 괜찮은 방송이 만들어지는 거니까.

(그렇지만 밤새는 건 역시 너무 힘들다)




한국에서 바게트를 먹으면 파리에서 먹었던 바게트만큼 맛이 나지 않는다.

뭔가 간이 좀 덜 된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프랑스 바게트처럼 입에 착 달라붙는 맛이 부족하다.


이런 맛의 차이를 나만 느낀 것은 아녔는지

한국의 한 제빵사가 프랑스의 바게트 맛을 내기 위해 고군분투를 했는데

아무리 노력해도 그 맛이 나지 않았다고 한다.

제빵사는 원인을 분석하기 시작했고 프랑스산 밀가루를 사용하지 않아서라고 판단해서

프랑스에서 직접 밀가루를 공수해 만들었지만 여전히 그 맛은 아니었다.


그런데 한국과 프랑스의 바게트 맛의 차이를 결정하는 건

아주 간단하고 미묘한 원인이 있었음을 알게 됐다.

바로 물이 다르기 때문!

프랑스의 석회수가 바게트의 적절한 간을 해주는 맛의 비결이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같은 예로 나는 바게트뿐 아니라 한국에서는 에스프레소를 마시지 않는다.

파리에서 마시던 적당히 씁쓸하면서 고소하고 풍미가 가득한 그 맛이 나지 않아서인데

프랑스에 가면 꼭 에스프레소를 마신다. 마치 원래부터 커피는 에스프레소만 마셨던 것처럼.

(에스프레소는 추운 날 파리의 노천카페의 난로를 쬐며 마시는 게 정말 최고다!)

한국과 프랑스 바게트의 맛의 차이가 물 때문이라는 말을 들은 후로

한국과 프랑스의 에스프레소 맛의 차이 역시 프랑스의 석회수 때문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게 됐다.



나의 바게트 첫 경험은 파리에서였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부드러운 바게트 맛에 빠져서 매일 바게트나 바게트 샌드위치만 먹었던 적도 있었다.


별맛이 아닌데도 바게트의 부드러운 촉감과 입에 착 달라붙는 그 맛이 너무 좋았고

바게트를 먹으며 파리의 거리를 걷다 보면 마치 파리지엔느가 된 것처럼 기분이 좋았다.

프랑스 여자처럼 어깨를 펴고 콧대를 세우며 도도하게 걸어보기도 했다.


그러나 나를 파리지엔느처럼 만들어주던 프랑스 바게트의 치명적인 단점이라면

바로 바게트의 바삭한 윗부분 때문에 입천장에 상처를 입게 된다는 것!

그래서 바게트의 부드러운 속 부분만 야금야금 떼어먹었던 적도 있었다.


프랑스 사람들은 바게트를 먹는 그들만의 노하우가 있다

그런데!

프랑스 사람들은 입천장을 다치지 않고 바게트를 먹는 그들만의 방법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 방법을 소개하자면,


1. 바게트를 입에 넣을 때 윗부분이 아닌 밑 부분이 입천장에 가도록 방향을 돌린다.

2. 바게트의 윗부분에 해당되는 곳을 꾹꾹 눌러준다.


그러면 바게트의 윗부분이 부스러지면서 조금 부드러워져 훨씬 먹기가 수월해진다.

입천장을 다치는 일도 줄어든다. 무릎을 탁 치게 됐던 나름의 유레카였다.

그 방법을 알게 된 후에 바게트를 먹는 프랑스 사람들을 관찰해보니

정말 바게트의 윗부분의 방향을 아래 바꾸고 딱딱한 부분을 눌러서 먹는 걸 볼 수 있었다.


아주 사소한 발견들이 우리의 삶을 좀 더 편하게 만들어 줄 때가 있다.

아주 단순한 생각이 복잡하게 얽힌 생각의 매듭을 탁- 풀어버리기도 한다.


복잡하고 어렵게 생각해야 '고뇌'가 아니고  

거창해야 '여행'이 아니다.

화려한 미사어구만이 '글'은 아닌것처럼.


어쩌면 삶도 여행도

가장 단순하고 가장 사소한 부분들의 '어떻게'가 모여 만들어지는 것 아닐까?

또 그런 사소한 발견들을 하기 위해 우리는 여행을 하는 건지도 모른다.


생각이 많으면 엉켜버리고 여행의 일정이 많으면 결국 동선은 꼬여버린다.

삶과 여행에서는

복잡한 과정들을 생략하고 우리는 조금 단순하고 조금 사소할 필요가 있다.

프랑스 사람들이 바게트를 먹는 방법처럼 말이다.


miel.may11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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