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하지 않아도 괜찮아
여행을 하는 순간이 매일 행복하고 황홀하지만은 않다.
어떤 날은 여행이 지루하고 어떤 날은 혼자인 게 심심하고 또 어떤 날은 생각이 나를 덮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이불속에 숨어만 있고 싶을 때도 있다.
그래서 어떤 날은 최대한 미적대다가 오후 늦게서야 겨우 밖에 나간 적도 있고
어떤 날은 밖에 나간 지 3시간 만에 숙소로 돌아와 쉰 적도 있었다.
막상 오늘은 나가지 말고 쉬어야지 하다가도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라는 생각에 몸을 벌떡 일으켜 세운적이 수도 없이 많다.
그런 날은 여행을 하지 않고 산책을 하거나 맛있는 커피를 찾아다니거나
센 강에 앉아 한참을 음악을 듣거나 하며 시간을 낭비한다.
(그럴땐 이문세나 김동률 혹은 장윤주의 음악이 어울린다.)
그러나 시간을 낭비하자고 작정한 날에 막상 카페에 앉아 사람들을 구경 하다 보면
한 시간도 되지 않아 또다시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라는 생각이 든다.
그럴 때면 나는 스스로에게 말한다.
여행하지 않아도 괜찮아
열심히 여행하는 사람들을 보면 나도 얼른 일어나 좀 돌아다녀야 하나 싶다가도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서 이곳에 온 거니 조금 천천히 지내도 괜찮다고 스스로를 다독인다.
우리에겐 각자만의 속도가 있다.
대학을 가지 않고 바로 취업을 하는 사람도 있고 무엇을 하고 싶은지 몰라 방황하는 사람도 있다.
혹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잠시 멈춤을 선택하는 사람도 있으며
누군가는 3개월 만에 결혼을 하고 누군가는 10년을 사귀어도 결국 헤어지기도 한다.
삶을 살아가는 방식에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은 없다. 그저 각자의 속도로 살아가는 것뿐이다.
여행도 마찬가지다.
아침부터 밤까지 전투적으로 여행을 하던, 계획없이 마음 가는대로 돌아니던 각자의 속도로 하면 되는 것이다.
온전히 자신만의 시간을 자신의 속도로 꾸려나가면 되는 것이다.
삶의 속도도 여행의 속도도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것뿐이니까.
우린 매일을 아침부터 밤까지 빈틈없이 하루를 채워가며 열심히 사는데도
남보다 뒤처지는 게 아닐지 늘 불안해한다.
나 역시 일을 할 때는 하루에 물 한 모금 마실 시간조차 없이 하루를 빼곡하게 채우는데도
내 미래에 대해 끊임없이 걱정하고 고민한다. 그럴 땐 생각이 넘쳐서 생각에 지쳐버린다.
그런데 여행에서는 그러지 않아도 괜찮다.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되고 무언가를 할 필요도 없다.
자신이 서 있는 그곳에 온전히 나를 맡겨보는 것,
지금 내가 있는 이곳의 분위기와 온도와 습도를 온몸으로 느껴보는 것,
그것만으로도 꽤 근사한 여행이 될 수 있다.
파리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이번 파리 여행에서는 1일 워킹투어를 신청했다. 그때 함께 길을 걷던 가이드님이 그런 말을 했다.
"파리에서 뭘 해야 하냐고 물어보시는 분들이 많은데 파리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나는 그 말에 꽤 큰 위로를 받았다. 나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서 파리에 간다.
파리에서 나는 대부분을 공원에서 낮잠을 자거나 카페에 가서 사람들을 구경하거나
괜히 에펠탑 주변을 어슬렁 거리거나
발길이 닿는 대로 무작정 걷거나 아무 버스나 타고 아무 곳에서 내려본다던가
또는 센 강에 앉아 맥주를 마시며 시간을 보낸다.
대부분의 여행들에서도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모두 가우디를 보러 가는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나는 2주 동안 대부분의 시간을 바로셀로니따 해변에서 맥주를 마시며 보냈다.
그래도 괜찮았고 그래서 좋았다.
내 뜻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는 삶에서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니까,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온전히 나를 위해 쓸 수 있었으니까,
빼곡히 채워진 현실이라는 틀 밖으로 나와서 조금은 느리게
가끔은 시간을 낭비해도 괜찮은 게 바로 여행이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여행하지 않아도 괜찮다.
마음껏 시간을 낭비해도 괜찮다.
그게 여행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