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흐린 날이었다.
바람이 많이 불어 얼른 따뜻한 곳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이런 생각이 들 때면 나는 오랑주리 미술관으로 간다.
자연채광을 듬뿍 받을 수 있게 설계된 오랑주리 미술관은
‘오렌지 온실’이라는 상큼한 뜻을 가졌다.
과거 겨울철 루브르 궁전의 오렌지 나무를 보호하는 온실로 사용됐다고 한다.
따뜻한 이름만큼 따뜻한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는 곳.
내가 이곳에 와야 했던 이유는 모네의 수련 연작 때문이다.
두 개의 하얗고 둥근 방 안에 아련하게 펼쳐진 모네의 수련 연작.
보고 있으면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느낌이다.
금세 주변이 촉촉해지고 나는 모네의 그 연못 속으로 뛰어 들어가 헤엄을 치고 있는 것만 같다.
파랗고 자줏빛의 수련은 생동감이 넘쳤다.
물을 머금은 듯, 물이 흐르는 듯,
그 일렁거리는 느낌이 좋아 한참 동안을 그 앞에 앉아있었다.
이 모든 순간이 마치 마법 같다는 생각을 했다.
파리는 이토록 예고도 없이 마법 속으로 나를 초대하곤 했다.
그건, 아주 멋진 일이었다.
노트르담 성당 주변은 여행 중 가장 많이 발길 닿았던 곳이었다.
장엄한 노트르담과, 센 강.
활기찬 소로본 대학과, 궁전 같은 룩셈부르크 공원이 한데 모여 있는 곳.
노르트담 성당을 바라보며 샌드위치를 먹고,
센 강 위를 건너다 다가오는 유람선에 반갑게 손을 흔들어 주고,
소로본 대학가에서 아이스크림을 사 들고 룩셈부르크 공원까지 가면 정말이지 완벽한 오후가 된다.
몇 번이고 같은 길을 걸어도 몇 번이고 행복했던 그런 날들.
내게 허락된 여유를 사치 부리듯 쓰곤 했다.
룩셈부르크 공원에 앉아 사람들을 구경하고, 책을 읽고, 낮잠을 자고,
때론 하늘 위 하얀 구름들을 모아 쿠션처럼 기대면
한때 사랑이라 의심하지 않았던 누군가의 품보다 훨씬 더 아늑했다.
복잡했던 머릿속이 말끔히 청소가 된다.
내 안에 무겁게 자리 잡은 알 수 없는 그리움도 그 시간만큼은 잠시 가벼워진다.
그래, 사는 게 다 그렇지. 사랑이 다 그런 거지.
마치 사랑 꽤나 해본 여자처럼, 귀여운 허세도 부려본다.
내게 파리에서의 시간들은 대체로 그런 날들이었다.
파리를 거니는 곳곳에 내 마음을 소중히 심어 두고 그리울 때면 언제든 다시 찾아가 볼 수 있었던.
눈부시게 찬란했고 눈부시게 아름다웠던 그런 날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