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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혜 Dec 13. 2018

타인의 시선에서 나를 잃지 않는 법

파리 북역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였다.

그날은 파리에서 며칠 런던에 갔다가 다시 파리로 넘어왔고 저녁 비행기로 한국으로 돌아가는 일정이라서

북역에 짐을 맡겨두고 찾으러 가는 길이었다.


북역을 몇 정거장 앞두고 버스가 정류장에 멈췄을 때 한 여인을 보았다.

백발머리를 돌돌 말아 올리고 포근해 보이는 카디건에 H라인의 스커트.

그리고 하이힐까지 신은 황혼의 여인.

한치의 흐트러짐 없이 허리를 세우고 또각또각 하이힐을 신고 거니는 그 여인이 무척이나 인상 깊었다.


파리의 공원이나 카페에 앉아 사람들을 관찰하다 보면 유모차를 끌고 온 엄마들, 중년 여성들

백발이 멋들어진 황혼의 여성들 모두 자신의 개성을 한껏 뽐내는데 주저하지 않는 것 같았다.

유모차를 끌고 온 엄마도 선글라스에 하이힐을 신고 백발의 여성도 짙은 화장에 미니스커트를 입는다.


나를 잃지 않고 살아간다는 말이 와 닿았던 순간이었다.

단순히 나를 가꾸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내가 입고 싶은 대로 입는다는

그들의 생각과 그런 타인을 존중하는 모습이 깊게 와 닿았다.


평소엔 집 앞 슈퍼 정도는 세수도 안 하고 다니는 나지만 일할 때만큼은 화장을 한다.

야외 녹화를 마치고 그다음 야외 녹화까지 한 시간 정도 여유가 있을 때도 얼굴을 씻고 화장을 고쳤으며

밤을 새우고 두세 시간 후에 다시 출근을 해야 할 때도 방송국 수면실에서 잠을 자는 대신

집에 가서 다시 화장을 하고 나온 적도 있다.


첫째는 밤을 새운 티를 내고 싶지 않아서였고 둘째는 흐트러짐 없는 모습을 보이고 싶었으며

셋째는 사람들이 으레 생각하는 작가의 모습이고 싶지 않았다.

그 모습이란 화장끼 없는 얼굴에 펑퍼짐한 편한 옷들을 입고 머리를 질끈 묶는다거나 동글뱅이 안경을 쓴 모습.

다른 사람이 생각하는 작가의 모습을 나만이라도 깨고 싶어서 나는 늘 화장을 하고

미니스커트를 입고 때로는 하이힐을 신고 출근을 하기도 했었다.


그런 나에게 선배들은 외모나 몸매를 지적하기도 했으며

'언제까지 그렇게 하고 다니나 보자'라던가 '그럴 시간에 글이나 더 쓰라'는 말들을 하기도 했다.

그래도 단 한 번도 쌩얼로 출근한 적이 없었다.

남들이 잘 때 일찍 일어나 나를 가꾼 것이기 때문에 일에도 전혀 지장이 없었으며

(다른 사람 잘 때 내가 일을 해야 하는 이유는 없으므로)

내 글이나 일처리는 종종 윗분들에게까지 칭찬을 받기도 했다.


단순히 남들의 시선 때문에 그렇게 꾸미고 다녔던 것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나를 꾸미는 게 즐거운 사람이라서 그 모든 것들이 수고스럽거나 번거롭지 않게 느껴졌다.

무엇보다 일 때문에 나를 잃고 싶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적어도 나에게 화장이나 옷차림은 나를 표현하는 또 다른 방법이었다.


지금보다 훨씬 어렸을 때의 연애를 생각해보면 나는 내가 아니라

상대방이 원하는 이상형에 맞춰 나를 바꿔가기도 했다.

그게 얼마나 나를 갈아먹고 얼마나 나를 잃어버리는 일인지도 모르고.

몇 번의 그런 연애를 겪은 후 나의 이상형은 '나를 모두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 됐다.

나를 바꾸지도, 내가 바뀌지도 않게 그저 나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 줄 수 있는 사람.


여행도 마찬가지다.

'여기 꼭 가봐야 한다더라, 이거 꼭 먹어봐야 한다더라' 타인의 기준에 맞춰 움직이는 게 아니라

내가 진짜 무엇을 보고 싶은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엇을 먹고 싶은지 기준은 내가 되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봤던걸 보지 않았더라도 내가 지금 이곳에서 가장 하고 싶은 것을 했다면

하루 종일 멍하니 센 강만 바라봐도 최고의 여행으로 기억될 수 있다는 것이다.

참고로 그동안의 나의 여행을 통틀어 가장 기억에 남는 여행 일정은 파리의 룩셈부르크 공원에서

따사로운 햇살을 맞으며 낮잠을 잤던 것이었다.


누군가 나에게 파리가 왜 좋냐고 물었을 때 이렇게 대답한적이 있다.


"파리의 길거리를 거닐면서 술을 마신다던가 내가 갑자기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춰도

  아무도 나에게 뭐라 하지 않을 곳이니까"


파리에 가면 그게 제일 좋았다.

내가 무슨 옷을 입던 어떤 머리색을 가졌던 무슨 짓을 하던 아무도 나에게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어느 학교를 나오고 얼마를 버는지가 아니라 그저 나라는 사람을 궁금해주는 것.

그래서 나를 감추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여줄 수 있다는 것.


우리는 수많은 타인의 시선과 기준에 나를 맡긴다.

나를 잃지 않고 중심을 잡고 살아는 일은,

나를 잃지 않고 나만의 여행을 만들어가는 일은,

그런 타인의 시선에서 조금 벗어나 깊숙히 나를 들여다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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