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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지윤 Jun 01. 2020

당신의 재질을 말씀해 주세요

Prologue

애초에 용도대로 쓰임을 받은 못은 이미 소멸하였으나 임무를 다하지 못한 것은 작품이 되어 백년 후에도 남았다



안녕하세요.

혹시 무슨 색을 좋아하세요.


처음 만난 우리가 서로를 알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질문이다.

누군가를 알게 되고 서로에게 호감을 품었다면 우리는 나와 다른 타인에 대해 알고 싶어 진다. 그럴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질문을 하는 일이다.

그러나 그동안 우리가 흔히 타인을 이해하기 위해 던져왔던 질문들에 다소 오류가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직업이 무엇인가요, 어떤 일을 하시나요, 연봉은 얼마나 되죠, 어디에 사시나요.

우리가 타인을 알아간다고 생각하는 질문과 답 속에서 진짜 한 인간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사실 아무것도 없었는지 모른다. 그의 주변부와 그의 허울과 그의 외관. 사람의 깊은 심연을 들여다 보기에는 어딘가 불충분해 보인다.

어쩌면 그게 우리가 늘 사기꾼들의 타겟이 될 수 있는 이유 인지도 모르겠다. 고액의 연봉을 받고 번듯한 직장을 가지고 있고 명품아파트에 살고 있는, 고가의 시계를 찬 그의 모습에 우리는 그를 알았다고 생각하고 안심을 한다.


많은 사람들이 대체로 타인의 사소하지만 진짜 중요한 정체성은 궁금해하지도 않는다. 어쩌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의 개성조차 모르고 있는 것 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그런 것 따위 알 필요도 없는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고.

태어날 때부터 우리는 정체성을 가지고 나온다.


정체성(正體性)

noun 변하지 아니하는 존재의 본질을 깨닫는 성질. 또는 그 성질을 가진 독립적 존재.


직업과 연봉으로는 당신의 변하지 않는 존재의 본질과 그만이 가진 고유한 성질을 이해할 길이 없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고유의 정체성 정도는 타고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각자의 개성, 기질과 성격과 재능, 차갑거나 뜨겁거나 느리거나 빠르거나 활동적이거나 차분하거나. 각자가 타고난 기질이 선호하는 것을 만들고 그것들이 쌓여 점점 나라는 인간이 자라고 변이 하여 형질을 이룬다. 자라면서 부딪히는 외부 환경으로부터의 변화 역시 자신의 기질을 기반으로 한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나는 태어날 때부터 그림이 따라다녔다. 그것은 나의 엄마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나를 품기 전부터 품고 살던 예술에 대한 열정이 뭉근히 엄마의 피안에 담겨 있어고 그 피로 만들어진 내가 결국 그림이라는 유전자를 덕지덕지 묻히고 세상에 나온다.

간단하게 말하면 엄마는 내가 그림을 그리기를 원치 않았다. 그러나 내가 그림을 그리고 살지 않았던 날들에도 그것은 끈덕지게 그림자처럼 거기 기울어진 체 있었다. 그리고 도망쳤지만 어쩔 수 없이 체포당해 끌려가는 죄인처럼 나는 결국 그곳으로 회귀했다.

그런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크고 작게 어떤 기질을 가지고 태어난다. 달아나고 도망치고 외부의 환경으로 변하지만 피안에 흐르고 있는 나라는 정체성을 결국 변화시키는 것은 아니다. 내가 변한 것 역시 내 천성에 기반을 둔 것이니까.

DNA야 머리카락 몇 가닥 뽑아 검사를 해보면 명확하게 결과가 나오는 것이지만 그 DAN보다 진한 한 인간의 개성은 긁어낸 상피세포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내가 혹은 나도 잘 모르겠는 나를 알아야 했다.


그러려면 질문을 해야 했다. 끊임없이. 그리고 제대로 된 질문을.


애석하게도 어쩌면 요즘 현대인들은 자신의 관한 질문의 농도가 깊어질수록 대답을 곤란해할지도 모르겠다. 듣도 보도 못한 질문.

그것은 직장이 어디예요 연봉이 얼마예요 라는 질문에 대한 답만큼 자명하지도 확실하지도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스펙을 안겨준 무수한 시험문제의 답과 원하던 회사의 면접 질문에는 만점을 받던 당신이 쉽게 할 수 없는 대답. 답이 선명하지 않은 대답.

우리는 꽤나 번듯한 것들에 둘러싸여 있다. 멋진 타이틀과 새로운 자동차 그 안의 이야기와는 상관없이 지명으로 대체되는 주거지 등으로도 타인에게 나를 설명하기에는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요즘 현대인들의 모습은 제품에 잘 조여져 있는 나사와도 같다.


제품을 지탱하는 나사처럼 모두 어딘가에 착실하게 쓰이고는 있으나 관심을 받거나 주목받지는 못한다. 누군가는 고급 가구에 또 누군가는 한철 쓰고 버려지는 일회용품에, 각자 박혀 있는 위치가 다를 뿐 어딘가에 무던히도 쓰임 받고 있다.

물론 제아무리 고급 가구라도 그것이 가구의 꼴을 갖추어 완성이 되려면 나사는 없어서는  안 될 물건이다. 그러나 그 누구도 완성된 가구를 보며 나사의 사정을 헤아리는 이가 없다. 그 누구도 나사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것이다. 어쩌다 가구가 휘청 하는 순간이 오면 들여다보고 다시 조여질까. 쓸모가 없어지면 버려지기도 쉽다.


나는 지금 우리의 모습이 그 나사와도 같다고 생각했다. 누군가의 손과 복잡한 과정을 거쳐 어렵게 생산되었으나 고작 부품으로나 쓰이는. 그들도 공장에서 나오는 순간에는 반들반들 윤이 났을 텐데 가구를 받쳐주지 않으면 쓸모가 없어진다.

나는 그런 나사에게 관심을 주고 싶다. 너는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어떤 어떤 색을 가지고 있는지 묻고 싶었다.

이제 막 공장을 나온, 어딘가에 쓰이지 않으면 쓸모가 없는 운명을 지닌 나사든 이미 쓸모를 다 해 구부러지고 녹이 쓴 채로 버려진 나사든 나는 그것들을 주어다 귀한 자리에 올려 두고 오롯이 그것을 위해서만 조명을 비춰주고 싶었다. 목이 짧은 나사 도금이 된 나사 머리에 십자가 새겨진 나사 혹은 일자가 새겨진 나사 뚱뚱한 나사 길고 뾰족한 나사. 어느 가구나 제품에 쓰일 땐 주목도 관심도 받지 못했던 나사들 하나하나에 이름을 붙여 주고 예쁜 도자기 위에 얹어 전시를 해 내보여 주고 싶은 마음. 그러면 그들도 빛이 날 텐데.

고가의 가구에 조여진 나사던 싸구려 합판에 조여진 나사던 그들이 무던히도 떠받치고 있는 그 가구의 모습은 그들이 아니다. 그걸로는 그 안에서 열심히 쓰여지고 있는 부품의 재질과 모양과 촉감 등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걸로는 내가 누구인지 나라는 한 유일하고 무이한 한 개성에 대해 알 수 있는 어떤 대답도 유추할 수가 없다.


네가 꼭 무엇일 필요 없어. 너는 너 자체로도 가치 있으니까.


나는 그들에게 아름다움을 선물해 주고 싶었다.

아름다운 것은 대체로 쓸모가 없다.

벽에 걸린 그림이 그렇고 어디서나 흘러나오는 아름다운 멜로디, 음악이 그렇고 한 편의 시가 그렇다. 그것은 무엇으로부터 필요로 하지도 충족하지도 않는다. 그 자체로 아름답고 또 자체로 가치 있으며 자체로 의미가 되는 것이다. 그것에게 쓸모란 필요 없다.

(나사는 자고로 가구 조립에나 쓰여야지 하는 사람들에게라면야 먹고살기 바빠 죽겠는데 예술은 개뿔, 나부랭이가 되겠지만)

당신이 어떤 모양인지 어떤 재질인지 그곳에 쓰임을 다한 뒤 그곳을 빠져나와도 너는 너 일 수 있는지. 그대로 쓸모없이 아름답기만 할  수 있는지. 너를 끊임없이 물어 스스로 정체성을 찾고 아름답게 해 주고 싶다.


너를 들어 예쁜 유리 그릇에 올려놓고 전시를 하고 싶다.


어디에 속하지 않고 온전한 너의 모습이 예쁜 그릇 위에 올라가 조명을 받는다. 순간 너는 보석처럼 반짝인다. 많은 사람들이 당신을 바라본다. 너에게 더 이상 쓸모를 찾지 않는 사람들. 너도 아름다울 수  있구나. 그들의 눈에 비친 너의 모습은 무척 가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꼭 매 순간 쓸모 있을 필요가 없다.

아름다운 것은 대체로 쓸모가 없으므로.




그래서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요'

당신이 떠받치고 있는 가구의 모습 말고 당신의 재질을 말해 주세요.






New York. The Armory Show 2019


Bela Kolarova / Five by Four 1967. MOMA (Wood, Paint, and Metal Paper Fasteners)



벽에 박히거나 종이 뭉치에 박혀야 할 것들이 자신의 임무를 다하지 않는다.

무언가의 부품으로 쓰이기 위해 생산된 것들이 고정관념을 깨고 쓰임을 거부한 채 소수에 속한다. 사회적으로 질책받고 쓸모없는 존재가 된 것 같지만 가구나 벽 혹은 서류 따위에 처박혀 휘거나 구부러지지 않은 못은 의외로 작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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