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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지윤 Aug 31. 2020

연필의 마음

흔한 것 (힐마 아프 클린트의 드로잉)

나는 소멸한다.  그러나 나의 소멸됨은 결국 존재에 기인한다.


흔한 것의 특별함


연필의 마음.


너에게 쥐어진 채로 나는 행위한다.

쥐어진 이에 따라 나의 행위는 우아한 시가 되었다가 레스토랑 영수증 위의 넘버가 되기도 한다.

유려한 곡선을 그려 그림이 되어지기도 하고 세련된 라인으로 건축의 도면이 되기도 한다.

나는 소모된다. 하찮은 낙서가 되어 버려지든 귀한 작품이 되어 벽에 걸리든 나는 소모되고 사라진다.


그러나 나는 특히 어떤 이의 위로가 되어지거나 사랑의 노래가 되어지기를 좋아한다.

외로운 밤 여백만 가득한 종이 위에 쓰여지는 마음이 되어지기를 좋아하고, 가슴 설레는 밤 일렁이는 감정을 표출할 때의 그 떨림을 좋아한다.


그리고 오늘, 네가 사랑을 고백하기로 결심한 밤에 내가 있다.

나를 쥐어든 너의 손이 미세하게 떨려 왔다. 너는 영수증 위 싸인 따위를 할 때와는 달리 나를 쥐고 오래도록 멈춰 있었다. 싸인을 할 때의 손처럼 빠르고 간결하게 행위를 마치고 나를 던져버리는 순간과는 확연히 다른 것이다.


사진속 웃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며 나를 움켜쥔 너의 손에 습기가 배이고 달뜬 열이 올랐다.

나는 너에게 행운을 빌어 주고 싶었다. 너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고 싶었다. 가능하다면 마법을 부려 주고도 싶었지만 나는 고작 종이 위에 한 편의 시가 되어줄 수 있을 뿐, 고작 그런 연필에 불과했다.


사랑을 고백하는 순간은 매우 매력적이었다.

너는 나를 오랫동안 붙들고는 놓지 못했다. 홀린 듯 여려 단어를 조합해 나열했다가는 광기 어린 손동작으로 그 나열들을 검게 만들었다. 분열된 단어의 조각들을 다시 문장으로 만들고 또 부수기로 온 밤을 사용했다. 그러다가 다시 나를 그러쥐고 여백을 콕콕 찍었다가 이내 한숨을 쉬기도 하는 너의 손에 붙들린 그 밤 나는 너와 하나가 되어 있었고 시가 되었다.


사진속 그녀에게 닿을 아름다운 언어들, 나는 종이위에 유려한 필체로 말이 되어 탄생한다.


물건이란 흡사 인간의 몸과 연결되는 순간 생명을 발한다. 컴퓨터의 자판과 안경과 청진기와 물컵과 하다못해 불쏘시개 곡괭이 의자 등등의 세상 모든 물건은 그 접촉함으로 생을 발휘한다.


매 순간 우리는 그 생의 여분으로 존재한다.

나를 곱고 예쁘게 대하는 사람 나를 던지고 부러트리는 사람 나를 방치하는 사람. 나는 그런 사람들의 모든 순간에 생 하며 그로 인해 고급이 되어 오래 존재하기도 하고 싸구려가 되어 쉬이 버려지기도 한다.


오늘, 나는 사랑을 고백하는 한 인간의 손에 쥐어져 시가 된다. 사랑의 노래가 된다. 사진속 그녀의 마음 안 영원한 감동이 된다. 검고 단단한 내 내부가 희고 반듯한 여백에 미끌리고 소모되어 아름다운 말이 된다. 어느 한 사람의 진심이 물리적 말이 되고 그 말이 또 다른 한 사람에게 실제가 되어 존재한다. 나는 그렇게 공중에 분포된 형체 없는 감정의 에너지를 종이 위에 글로, 말로 물리적으로 형체화 시킨다.


나는 닳고 사라진다.

깎이고 바스라 진다.


가끔은 창작가의 손에 구겨진 종이 위에 얹어진 채로 생을 마감하고 때로는 액자에 귀하게 걸려 수백 년 동안 우아한 갤러리에 걸리기도 한다. 어떤 이의 추억 속에 오래오래 간직되어지기도 하고 그 자리에서 갈기 발기 찢기기도 한다.


그뿐이다. 나는 소멸한다.

그리고 내 소멸은 존재에 기인한다.


지금 어딘가에 무던하게 쓰이고 소모되어지는 당신에게 말하고 싶다.

당신이 존재하는 의미를 찾으라고 당신이 소멸됨은 결국 존재에 기인한다고 말이다.


그리고 아름다운 일에 쓰이기를. 가치 없고 흔해빠진, 세상천지에 굴러다니는 연필일 뿐이지만 수토쿠의 빈칸에 갇힌 숫자가 되지 말라고 다음 순간 버려지는 영수증 위의 흘긴 싸인이 되지 말라고.


아름다운 멜로디의 음표나 유려하고 섬세한 선이 되어 작품이 되라고. 검고 부러질 듯 가벼운 나라는 존재, 가치 없고 흔해빠진 그저 그런 내 몸이 소모되고 뭉그러 졌으나 아름다워진 것처럼.

감동을 주고 의미가 되며 아름다워지기를 주저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다.


오피스에 굴러다니던 연필도 한 편의 낭만적인 시가 될 수 있다. 나는 나를 의미 있는 존재로 남을 수 있도록 해 준 너로 인해 아름다워진다. 부디 너를 굴러다니는 하찮은 존재로 여기는 이들로 인해 상처 받지 말고 소모되지 말기를. 너를 귀하고 소중히 여기는 이들을 위해 존재하기를. 사진속 그녀의 추억에 영원한 기쁨이 되기를.





나는 흔해 빠진 연필이다.

그러나 나는 누군가에 따라 시가 되기도 하고 멜로디가 되기도 하며 그림이 되기도 한다.

나는 너를 싸구려로 흔해빠진 무엇으로 부러트리고 망가트리며 던져버리는 이들에 의해 너를 너의 귀한 생을 허비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부디 시가 되고 음악이 되어 쓸모없이 오래 아름답기를.


나는 오늘 너의 손에 들려 사진속 그녀에게 고백되는일로 무른 몸을 닳린다.

소모되므로 남는다. 사진처럼.


나는 아름답게 부서진다.






Spiritual Drawings (Spiritistisk teckning) of The Five (ca. 1903 - 04) Graphite on Paper



Hilma af Klint / Guggenheim. New York 2019.



Collective Works of The Five (De Fem)

힐마 아프 클린트의 연필 드로잉들. 오직 연필과 종이, 그런 것들로 백년이 넘는 시간을 버텼다. 오직 그런 것들로 그저 아름다웠다. 오직 그런 것들로 최고로 우아한 자리에서, 오직 그런 것들로 누군가에게 감동을 주었다. 오직 아름다움으로, 그저 가만히 존재하는것 만으로도 너는 가치 있었다.



My Favorite Blackwing Pencils



Blackwing Point Guards / 602 and Prarl



Winsor and Newton Charcoals / Staedtler Mars Lumograph, Black



Faber Castell / Koh - I - Noor



Lyra Graphite Crayon / Staedtler Mars Lumograph 4H to 8B



나는 연필이다. 나는 너로 인해 시가 되기도 하고 멜로디가 되기도 한다



오피스에 굴러다니는 흔한 연필도 한 편의 낭만적인 시가 되거나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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