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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돼지터리언국 총리 Nov 26. 2018

브라보 마이라이프...살면서 만난 은인들에 대해

#단상

 

   '눈 뜨면 천국이었으면 좋겠다.'
    짧은 인생이지만 내가 가장 많이 했던 기도 제목이 아닐까 싶다.
    지금이야 웃으면서 하하호호하는데 험로를 걷던 당시는 조금 막막했던 것이 사실이다. 

     지나고 나면 추억이라고, 지금은 나를 단단하게 해준 연성의 시간으로 기억되지만, 당시는 사방이 시멘트로 된 벽이 점점 옥죄여 오는 것 같았다.
    이 세상 만물과 사람은 홀로 된 것이 없다. 
    특히 나는 그런 것 같다. 항시 벼랑 끝에 몰렸을 때마다 은인을 만났다.
    이미 소개한 나의 대학 친구들과 엄마, 아빠, 내 고딩 때 단짝 친구 4인방, 와이프 등등등 많은 훌륭한 분을 만났다. 오늘은 진짜 똑 죽을 것 같을 때 만났던 은인들을 한번 떠올려 본다.
    첫번째 은인은 대쪽 같은 우리 할머니였던 거 같다. 그러니까 분가를 하고 아빠가 일하실 때였던가(웬일?) 부모님이 잠깐 누나와 나를 신경 못 쓰던 때가 있었다. 요때 집안은 어렵고 자존감도 낮아지고 뭐 그런 초딩 시절을 보냈는데 그때 할머니가 우리 고향에 있는 교회에 나를 데려갔다. 모태신앙이긴 했지만, 고부갈등으로 교회에 발을 끊은 엄마와 천상천하유아기를 보내시는 아빠는 딱히 교회에 가란 소릴 안 했으니 사실상 제대로 된 신앙은 할머니가 심어줬던 것 같다.(저는 모든 종교를 사랑합니다.)
    당시에는 부모님의 부족한 사랑을 교회에서 친구들과 어울리거나 선생님들한테 많이 받았던 거 같다.
    두번째 은인은 시골 교회 할머니 권사님들.
    워낙 시골인 고향에서 자랐기 때문에 내가 똘똘한데 삼수를 하며 힘겹게 수험을 하고 있다는 것을 온 동네 사람들이 다 알았다. 그때는 SKY에 가야겠다는 막연한 목표에 천착하던 때였다. 뭐 어찌 됐든 실패하고 서울의 한 사립대에 합격했다. 이름이 국립대 같아서 사립대인 것을 몰랐을 정도로 당시 나는 순진했다.
    막상 등록금 고지서를 받아들고 보니 입학금이 320만원. 당시 우리 형편으로는 헉 소리 나는 금액이었다. 전전긍긍하는데 엄마가 100만원, 할머니가 50만원을 보태줬다. 나머지 170만원은 구할 길이 막막해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대학에 갈까 고민하던 차였다. 
    그때 교회에서 장학금을 마련해 줬다. 어찌나 감사하던지. 우리 교회는 시골에 있어서 돈 많은 사람이 거의 없다. 교인 대부분이 밭일하는 할머니들이다. 헌금도 돈하고 쌀을 함께 내고 그랬다. 이렇게 모은 돈으로 겨우겨우 등록하고 입학증을 받았다. 물론 자취방 구할 돈이 없어 등록 후 바로 입대를 했다.
    군대에서는 또 어떤가. 
    나는 대학 입학이 미뤄지면서 뜻하지 않게 '고졸' 신분이 됐다. 이게 딱하나 좋았던 게 학력 미달로 군 복무를 상근예비역으로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상근예비역은 보통 예비군 중대나 동사무소 같은데 배치를 받아 출퇴근이 가능하다. 내가 그럼 그렇지. 나는 떡 하니 집에서 1시간30분 거리의 군부대에 배치를 받았다.
    먹는 걸 좋아했던 나는 행정병을 하라는 행정관님의 권유를 뿌리치고 취사병에 지원했다. 음...결과는 바로 3일 만에 후회. 어쨌든 군 부대 상근은 출퇴근하기도 어렵고, 현역과 같이 생활해 선후임 체계에도 포함돼 현역만큼 힘들진 않지만 준 현역쯤 되는 군 생활을 해야 한다.
    당시 등록금 마련과 집안을 건사해야 했던 상황들이 계속 발생하던 때였는데 다행히 나를 안쓰럽게 여긴 행정관님이 퇴근 후 학원출강을 허락해주셨다.
    '1일 3잡(Job)'을 이때 처음 해봤는데 이걸 생각하면 지금 기자생활은 VIP급으로 안락하게 느껴질 정도로 진짜 곡소리가 난다. 
    일단 새벽에 부대에 갔다가, 퇴근 후 학원으로 가서 밤 10시까지 수업을 하고, 퇴근 후 개인 과외를 새벽 2시까지 했다. 그러고 다시 눈 좀 붙이고 새벽에 부대로 출근하는 무한루프의 과정. 
    이때 지친 몸을 이끌고 매일 안방 이불 속으로 파고들면서 항상 기도했던 거 같다. 
    '아, 그냥 눈 뜨면 천국이었으면'
    지금 생각하면 철딱서니 없는데 당시에는 간절했던 기도다.
    다음 은인은 우리 아버님(와이프 아버지)이다. 
    어찌어찌 빚을 갚고 돈을 모아 상경에 성공했는데 학교를 1, 2년 정도 다니니 통장잔고가 천만원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아. 지긋지긋한 알바를 또 해야 하나 고민하던 차에 아버님이 전주에 좀 내려와 보라셔서 돌아오는 주말에 기차를 탔다. 
    "진방군, 통장에 돈 얼마 남았어?"
    "한 천만원이요. 왜요?"
    "거, 나 좀 빌려주지"
    "예?"
    "대신 이자로 매 학기 200만원씩 줄게"
    사회생활을 일찍 시작했기 때문에 눈치가 빠른 편이었던 나는 아버님이 일부러 나한테 돈을 빌린다는 것을 쉽게 알아차렸다. 너무 감사했지만, 당시는 자존심도 세고, 사나운 짐승 같은 상태여서 꾸벅 인사만 하고 다음 날 돈을 계좌로 틱하니 보냈다.
    말은 200만원이라 하셨지만, 당시 여자친구였던 와이프네 집에 갈 때마다 뭐 이것저것 챙겨주시고 용돈도 가끔 주셨다. 그리고 졸업을 앞두고 취직을 했을 때 처음 받아 가셨던 돈 천만원을 내 통장에 고스란히 보내주셨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내 기도 제목을 생각해보자. 
    '눈 뜨면 천국이었으면 좋겠다.'
    이뤄지지 않은 것 같던 이 기도는 사실 매일 이뤄지고 있었다.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나는 천국에 있었던 셈이다. 
    뭐 해준 것도 없는데 저런 은인들이 곧통의 순간마다 딱딱 나타나 나를 구해줬으니 말이다. 저렇게 남을 어여삐 여기고 아무 대가 없이 도와주는 사람들이 사는 세상이 천국이 아니면 어디가 천국일까.
    형편이 좀 풀린 뒤 내 은인들께 신세를 좀 갚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한 적이 몇 번 있다.
    그때마다 돌아온 대답은 "나 말고, 자네 주변 사람들한테나 해 줌 돼"
    나는 아직도 이말이 참 좋다. 내가 은인들에게 갚아봐야 딱 받은 만큼, 혹은 이자 조금 쳐서 갚았을 텐데 저 말을 들으면 딱 고만큼이 아니라. '좀 더 해야지'라는 생각이 앞선다.

    지금 콕 죽어버리고 싶을 만큼, 아니 죽을 용기도 나지 않을 만큼 힘든 시기를 격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주변에 은인이 있나 찾아 보자. 세상엔 홀로된 것은 없다는 것을 나는 운이 좋아 어려서 깨달았다. 
    힘들면 주저앉아 울어 버리자. 다만, 어딘가에 은인이 꼭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용기는 잃지 말자. 삶이 너무너무 힘들어도 그냥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당신의 용기에 박수를 보내고, 응원하는 사람들이 어딘가에는 있다.
    오늘은 내가 좋아하는 봄여름가을겨울님이 부른 '브라보 마이라이프'의 가사로 이야기를 맺는다.

    Bravo Bravo, my life 나의 인생아,
    지금껏 달려온 너의 용기를 위해,
    Bravo Bravo, my life 나의 인생아,
    찬란한 우리의 미래를 위해
++꼬꼬마가 살아온  인생사가 뭐라고 제 글을 열심히 읽어 주시는 여러분도 은인이십니다. 브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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