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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돼지터리언국 총리 Jun 25. 2019

<수필> 영수증 붙이던 노인

#패러디


    매달 25일이면 회사 비용 정산에 오전 반나절을 흘려보낸다. 1위안짜리 영수증 하나까지 찾아 풀칠을 하면 저기 단전 밑에서 짜증과 분노가 훅 치고 오르다가도 이 또한 베이징 생활의 한 편린이 아닐까 하며 소중히 한 장 한 장 영수증을 붙여 정산한다. 문득 이 모습이 학교 다닐 때 읽은 <방망이 깎던 노인>을 떠올리게 해 재미 겸 신세한탄 겸 한 줄 적어봤다.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애환 아닐까.


<수필> 영수증 붙이던 노인

-지은이 : 흙진방

    40여 년 전 나는 베이징 장안가 외교 빌딩 옆 길가에서 영수증을 붙이는 한 노인에게 풀칠을 부탁한 일이 있다.
    무뚝뚝해 보이던 이 노인은 차 시간이 늦어 재촉하는 내게
    "그럴 거면 그냥 붙이지 말고 가시오"한다.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기왕 기다린 김에 해보는 데까지 해보라며 길가에 걸터앉아 노인의 손만 바라보는 지루한 기다림을 시작했다.
    그러자 노인은 조금 누그러졌는지
    "자고로 영수증은 딱딱 각을 맞춰 붙여야 잔액이 틀리지 않는 법이요"
    라고 말하며 이미 다 붙은 것 같은 영수증을 붙이고 또 붙이고 하는 것이었다.

    결국, 차를 놓친 나는 부기 회계에 'ㅂ'도 모르는 노인이라며 속으로 역정을 냈다.
    내가 싫은 소리를 하며 재촉을 해도 흙노인이라 불리는 이 노인은 좀체 아랑곳하지 않고 풀칠을 멈추지 않았다.
    그로부터 한시진이 더 지나고 나서야 그 노인은 나에게 선 하나 없는 A4용지에 제식훈련을 받은 훈련병같이 날렵하게 줄을 맞춰 늘어선 영수증 서류를 넘겨주었다.
    나는 이깟 영수증 좀 붙이자고 차를 두 번이나 놓친 것에 분이 풀리지 않아 영수증 서류를 노인의 손에서 낚아채듯 빼내면서 "이거 좀 잘 붙인다고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습니까?"라고 소리를 빼-액- 지르며 자리를 떴다.

    그러나 나중에 영수증 서류를 받은 총무과 직원이 전화를 걸어와
    "영수증을 붙인 사람이 도대체 누구요? 서류를 위에서 아래로 슥- 훑기만 해도 영수증 금액이 바로 눈에 들어올 정도로 근래에 보기 힘든 풀칠이요"
    라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는 소리를 듣고서야 나는 비로소 내 잘못을 깨달았다.
    나는 그때서야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고자 했던 흙노인의 고귀한 장인 정신을 깨닫고, 그를 증오하고 멸시했던 자신의 경박함을 뉘우치게 됐다.
    풀칠 장인 노인 덕택에 나는 다른 어떤 부서보다 빨리 취재비 250위안(약 4만 원)을 돌려받았다.

    나는 미안한 마음에 마라탕에 빽알이라도 대접할 요량으로 다음 일요일 흙노인이 있던 장안가에 찾아갔지만 그를 만나지 못했다.
    장안가 옆 대로변에 서서 지난번 영수증 붙이던 흙노인이 풀칠을 다 한 뒤 허리를 펴고 무심히 바라보던 천안문 추녀를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푸른 하늘에 날아갈 듯한 추녀 끝으로 흰 구름이 피어나고 있었다.
    나는 무릇 장인이란 허술한 풀칠을 해서는 안 된다고 다짐이라도 하듯이 유연히 추녀 끝 구름을 바라보던 노인의 모습을 떠올리며 일종의 거룩함을 느꼈다.
#수필 #영수증붙이던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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