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엄마와 아프리카로 떠났나?


빗소리가 교실 창문을 두드린다.

교실을 걸어 나오면서 혹시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엄마가 왔을까? 우산을 들고 나를 기다리는 엄마 모습을 기대해보지만 수많은 인파 속에서 엄마를 찾을 수는 없었다. 낯익은 이모에게 우산을 받아 들고 집으로 향했다.


오늘도 내 기대는 어김없이 무너진다.

서운한 마음도 학년이 올라가면서 조금씩 줄었다.

"줄었다"기보다는 기대치가 낮아졌다.


식구들과 저녁 약속이 있는 날이다.

약속한 시각이 다가왔다.

온 가족 모두 엄마를 기다린다.

처음엔 뭘 먹을지 이야기하다가 차츰 말이 없어진다.

약속 시각이 지나갔다. 약속 시각을 넘기는 그 시점에서의 허탈함이란...


배가 아주 고팠고 허탈을 넘어서 가족들은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약 1시간 정도 지난 후 엄마가 급하게 들어오신다.

외식의 흥분은 이미 가라앉았다.

한마디로 김샜다.

가장 빠른 음식이 나올 수 있을 만한 식당으로 우리는 말없이 향했다.



어릴 적 엄마를 떠올리면 이런 서운한 기억들이 떠오른다.

내게 엄마는 항상 바쁜 존재였다. 지금으로 치면 워킹맘이었다.

지금은 워낙 워킹맘이 많지만, 당시는 일반적이지 않아 난 늘 엄마의 부재를 더욱 크게 느꼈다.

다른 엄마들처럼 아이와 같이 카스텔라 빵을 만드는 소소한 일상을 부러워하면서 난 다짐했다.

" 난 이런 바쁜 엄마는 되지 말아야지… "


바쁜 엄마 덕분에 어릴 적 나는 심리적으로 외로운 날이 많았다.

그러나 엄마가 거느려야 하는 수많은 식솔 덕분에 우리 집은 이모와 삼촌, 할머니까지 복작거렸다.

이런 환경은 엄마 부재의 외로움으로 고립되기보다는 독립적 성향을 특화해 자라게 되었다.


덕분에 나는 혼자 노는 것을 좋아하고 잘했다.

대학교 진학으로 서울에 올라오면서도 이런 독립적인 성향 덕분에 자취에 큰 어려움이 별로 없었다.

또, 음주와 가무를 즐기고 노는 것보다 다양한 호기심에 새로운 것을 탐색하고 도전하며 노는 걸 좋아했다.

그러다 대학생의 로망으로 홀로 떠난 첫 배낭여행이 신세계를 열어주었다.

세상에 홀로 놓이는 순간 참 자유를 맛보았다.

아무것도 기댈 것 없는 순간, 본능적으로 세포들이 살아 움직이는 걸 느꼈다.

이런 본능을 가슴에 품고 한동안 미친 듯이 돌아다녔다.




내게 엄마는 너무 큰 사람이었다.

엄마 바라기처럼 엄마의 사랑에 늘 아쉬워하긴 했지만, 엄마의 삶의 여정은 존경했다.

살인적인 스케줄을 소화하면서도 불평불만하는 걸 들어본 적이 없다.

더 많은 일을 해서 성취감을 느끼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푸는 사람이었다.


이런 엄마에게 예기치 않은 휴식이 찾아왔다.

방아쇠 증후군으로 손가락 수술을 받으셨다.

덕분에 온전한 3일간 휴가를 보내게 되었다.

엄마가 이렇게 긴 휴가를 보내본 건 이때가 처음인 것 같다.


물론 그간 공식적인 휴가들이 있지만 내가 보기에 그건 휴가라기보다는 가족들을 위한 다른 업무의 연장 같은 느낌이었다. (40명쯤 되는 외가 식구들은 때때로 모두 함께 여름휴가를 떠나기도 했다. 동창회 수준의 거대 천막을 치고 캠핑을 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온전히 엄마를 위한 휴가나 휴식은 아니었다.

3일간 휴가에 엄마는 좀 당황하신 듯했다.

내가 전화해 “엄마 신나게 놀아!!!”라고 했는데 엄마의 말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어떻게 노는지 모르겠어….



노는 걸 누가 알려줘야 할 수 있는 건가? 하는 의문이 들면서 머리를 망치로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수많은 세월 동안 자신이 하고 싶고 놀고 싶은 것보다 해야 할 것에 집중하는 것이 몸에 배어버린 엄마에게 어떻게 놀아야 할지는 문과생에게 이과생의 수학 문제를 푸는 것처럼 아주 어려운 과제였다.


한편 엄마 나이를 실감하게 되었다.

나는 서울에 엄마는 지방에 있어서 멀리 있기도 했지만, 업무로 워낙 바쁜 일정을 보내는 엄마였기에 엄마의 갱년기나 우울증에 대해서는 크게 걱정해 본 적이 없었다.

오빠들 사이에서 자라서 사근사근함은 좀 떨어지지만 그래도 이렇게 무심했던 내가 원망스럽기도 했다.


그럼, 엄마 나랑 놀자!


자매가 없는 난 나이가 들면서 자매 같은 모녀 사이가 부러웠다. 어릴 적 엄마와 여유 있는 쇼핑을 하거나 수다를 떨어본 적이 없다. 엄마에겐 이런 시간이 사치였을 것이다. 서울에 몇 번씩 와도 세미나 참석이나 회의 참석만 하고 돌아가는 엄마, 나에게 여전히 엄마와의 시간은 갈증이었다. 정말 오랜만에 엄마를 온전히 차지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온 것이다. 서울에 오기 전 숙제 아닌 숙제로 뭘 하고 싶은지 생각해서 오라고 했다.


엄마가 해 온 과제는 연극이 보고 싶고, 영화도 보고 싶고, 인사동도 가고 싶다였다.

이건 그냥 생활 속에서 누구나 의지만 있다면 할 수 있는 것들인데 이게 하고 싶으셨다니 마음이 짠했다.


내가 인도를 다녀왔던 해다.

머리는 레게머리를 하고 배낭을 메고 돌아왔던 그때, 엄마가 나도 인도나 아프리카에 배낭여행을 한번 가보고 싶다는 이야기를 지나가듯 하셨다.

그때는 그냥 대수롭지 않게 들었다.

그런데 휴가 기간 내내 계속 그 이야기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언젠가 가겠지 했던 그때가 지금이 아닐까?

더 나이 들어서는 나도 엄마를 모시고 가는 게 자신 없을 것 같다.

지금 벌써 조금씩 아프신 데… 더 나이 먹어서 배낭여행이 가능하겠어?

이 3일간의 엄마의 휴가가 엄마와 나의 아프리카 여행의 도화선이 되었다.


아프리카 여행 ^^ 이때만 해도 저가항공이 그리 상용화된 시기가 아니라 아프리카에서 본 저 작은 비행기에 코웃음이 났다.





엄마!! 우리가 꿈꾸던 아프리카로 떠나자!!
지금 떠나야 해!!!





내가 자라면서 엄마를 보는 내 시각이 변해간다.

엄마라는 거대한 존재에서 인간으로서 여자로서 엄마를 만나게 된다.

내가 느꼈던 야생의 본능이 살아나는 그런 순간들을 엄마도 경험하게 해주고 싶었다.

패키지여행으로 돌아다니면서 사진만 찍는 그런 여행 말고 가슴 뛰는 그런 여행을 엄마와 떠나고 싶었다.


밑으로 다섯이나 되는 동생들을 돌봐야 했던 엄마 어깨를 무겁게 했던 그 짐을 내려놓고 딸이 노는 법을, 즐기는 법을 알려주고 싶어서 그리고 엄마를 여자로서 이해하고 싶어서 그렇게 우리는 떠났다.


가장 야생이 살아있는 그 공간

바로 아프리카로~

처음 묵었던 숙소의 창고. 창고에 슥슥 그려놓은 그림마저 꿈틀대는 생명력을 품고 있는 듯했다. 그렇게 아프리카의 첫인상은 날것이 숨 쉬는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