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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쓰는 사람 Jul 11. 2024

연기란 무엇인가(1)

발단은 마을밥상에서 밥 먹다가 나온 말 한마디였다. 마을 절기행사인 '하지제'때 마을의 소모임인 두레별로 역할을 하나씩 맡기로 돼 있었다. 내가 속한 언니두레는 마을행사 때마다 노래를 불러왔기에 나는 이번에도 으레 노래를 하려니 했다. 어떤 노래를 부를지 얘기를 나누다 잠깐 흥부전 얘기가 나왔는데 하지제 기획팀의 누군가가 그 얘기를 들었나 보다. 며칠 뒤 언니두레로 하지제때 마당극을 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이 왔다. (마을에는 두레모임이 몇 개 있고 한 주에 한 번씩 만나 어떻게 살았는지 삶 나눔을 한다. 내가 속한 언니두레에는 30대에서 50대까지의 마을 남성 9명이 있다.)     


나는 마당극을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퇴근 후에 개인적으로 이런저런 일을 하고 있어 바빴다. 공연준비에 시간을 쓰는 만큼 기존에 해오던 일에 소홀해질 것 같았다. 무엇보다 수십 명 앞에서 연기를 하는 게 부담이 됐다. 그렇지만 마음을 내서 뭔가를 해보려는 사람들 앞에서 대놓고 하지 말자 곤 할 순 없어서, '무리야, 안 되겠어'란 말이 나오길 바라며 말없이 방바닥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M삼촌이 "이번 하지제의 핵심주제가 '순종'이라고 하니 기획팀의 의도대로 따라가 보면 어떨까요?" 하니, 다른 두레원들이 덩달아 그러자는 것이다. 심지어 O동생은 본인이 마당극 대본까지 써보겠다고 나섰다. 나는 못하겠다는 말은 꺼낼 엄두도 못 낸 채 흥부전 마당극에 휩쓸려 들어가게 됐다.     


사흘 후 두레원 단톡방에 O동생이 <흥부자 흥부가 마을에서 살게 된 까닭은>이란 제목의 마당극 대본을 올렸다. 읽다 보니 점점 빠져들어 단숨에 끝까지 읽어버렸다. 흥부전의 원형을 유지하면서도 우리 마을 사람들 모습, 같이 밥 먹고 더불어 살아가려는 지향이 자연스레 반영돼 있었다. 애초에 배역을 맡을 사람이 누구인지 정해두고 대사를 써서 인물과 대사도 잘 어울렸다. 대사 옆에 동작설명까지 돼 있어 대본대로만 해도 꽤 괜찮은 공연이 될 것 같았다.     


어떻게 전문 극작가도 아닌 사람이 단 삼일 만에 이 정도 수준의 대본을 뚝딱 완성할 수 있는 거지? 더구나 O동생은 아이들 가르치고 여섯 살 난 유겸이를 돌본다고 시간도 별로 없을 텐데? 이런 사람을 천재라고 하는 건가? 글쓰기가 직업으로 삼고 있는 스스로가 초라하구나! 모차르트를 지켜보는 살리에르는 이런 심정이었을까? O동생은 십 대 때부터 삼십 대 중반인 지금까지 동서양의 철학, 역사책을 꾸준히 읽고 글을 쓰고 학생들을 가르쳐왔다. 수십 년째 꾸준히 쌓아온 내공이 이런 식으로 발현되는 건가?     


우리는 틈틈이 만나서 공연연습을 했다. 교실 중앙에 어정쩡하게 서서 대본을 소리 내 읽어본다. 생전 연기 같은 걸 해본 적이 없다 보니 어색해서 헛웃음이 난다. 다른 사람이 연기를 보니 왠지 그럴듯해 감탄하기도 한다. 실제 연습을 해보니 각자의 연기뿐 아니라 전체공연의 진행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게 피부로 느껴진다. 대사는 무대의 어느 위치에서 하고, 배경음악은 어느 시점에 틀고, 퇴장은 언제 하고 , 소품은 어느 시점에 누가 가져올지 등을 꼼꼼하게 계획해두지 않으면 실제 공연할 때 실수가 나올 것 같았다.      


두레원들은 대사를 그대로 말하는 대신 나름의 생각을 덧붙여 배역을 보다 입체적으로 만들어갔다. 여성 배역을 맡은 분들은 분장에 공을 들였다. 마을에서 책방을 하는 L님은 흥부 아내 역을 맡았는데 아주머니들이 텃밭농사할 때 쓰는 청록색 차양모자와 몸빼바지를 챙겨 왔다. 원래는 치마까지 입으려 했는데 부인께서 만류했다고 했다. 놀부아내역을 맡은 M님은 어떤 가발을 쓸지를 두고 고심했다. 처음에 긴 머리 부분가발을 들고 왔다가 만족이 안 됐던지, 다음 연습 때는 뽀글 파마 가발을 들고 왔다.      


M님은 출연분량은 얼마 안 됐지만 티 안 나고 수고로운 일을 묵묵히 했다. 장면장면의 동선을 점검하며 극이 매끄럽게 진행되도록 도왔고 연습 때마다 일찍 와서 극에 필요한 소품들을 준비해 두었다. 본인의 배역을 수행하는 것만큼이나 전체 공연이 제대로 진행되는 걸 중요하게 생각하는 듯했다.     


놀부역을 맡은 C님은 무대에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사람을 웃기는 재주가 있었다. 곤약처럼 부드러우면서도 반에반 박자 늦는 그의 몸동작을 보며 우리는 연습 때부터 많이 웃었다. C님의 놀부연기는 하면 할수록 능청스러워졌다. 행사와 공연진행 경험이 많은 그는 대사나 몸동작, 배우의 감정상태가 관객에게 어떻게 전달될지를 감각적으로 알았고, 이를 토대로 다른 사람의 연기를 지도해주기도 했다.     


한 번은 H님이 흥부역에 몰입해 자기도 모르게 감정이 올라간 일이 있었는데, C님이 '거기서 본인이 흥분하면 안 된다, 감정적으로 고조되는 부분에서도 본인은 침착해야 한다 ‘고 조언했다.(우리 마당극의 연기 수준은 이 정도였다!) 흥부역은 대사가 많고, 독창 부분도 있어서 대사와 노래를 외우는 것만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후에 H님의 10살 아들 동휘에게 들은 말에 의하면 집에서는 너무 많이 들어서 지겨울 정도로 노래연습을 했다고 한다.     


두레원들은 다들 바쁜 사람들인데도 마당극 연습에 열성적으로 참여했다. 분명 나의 미적지근한 태도와는 차이가 있다. 사람들은 어쩌면 이렇게 마을 일에 마음을 쏟을 수 있는 걸까? 나는 뭐든 열심히는 하지만 왜 열심히 하는지에 대한 나만의 이유는 뚜렷치 않다. 나는 주어진 현실에 몰입해서 살아가는 게 잘 안된다. 언제나 내 삶과 몇 발자국 떨어져 구경하는듯한, 주인공이 아닌 관객의 태도로 살아간다. 마치 내 삶이 여기 아닌 다른 곳에 있기라도 한 것처럼.     


나는 왜 마당극 연습에 시간을 쓰는 게 마음이 불편했을까?  나는 마을에서 사람들과 어울려 살고, 시민단체에서 일하며, 글도 쓴다. 월급이 적은 시민단체에서는 내가 원하는 만큼 돈을 벌 수 없으니 경제적으로 안정되려면 어떻게든 글쓰기로 성공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사회경제적 성취를 이룰 수 있는 유일한 분야가 글쓰기라고 못 박으면 글쓰기가 가장 중요하게 되고 다른 일(직장생활, 마을살이)은 덜 중요하게 돼 버린다. 나는 되도록이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일에만 시간을 쓰려한다. 하지만 이런 식의 생각이 과연 내게 이로울까?     


나는 글 쓰는 사람이지만 한편으론 노동상담소에서 일하고, 마을에서 살기도 한다. 글쓰기 이외의 것들도 분명히 나의 현실을 구성하고 있다. 내 생활을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으로 나눠 차등을 둬버리면 나는 중요한 것 이외의 영역에 있을 때 충실하게 생활하기가 어려워진다. 대충 살게 될 가능성도 크다. 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마음을 담아서 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이것은 글쓰기를 할 때 '무엇을 쓸 것인가'의 문제로 드러난다. 글쓰기는 삶과 이어져 있고 삶과 동떨어져 존재할 수 없다. 결국 나는 삶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써야 한다. 나는 내 삶에서 '글쓰기'만이 유일하게 집중해야 할 부분이라고 믿지만 내가 쓰게 되는 것은 '글쓰기'가 아닌 '삶'이다.    

  

하지만 나는 '삶'을 '글쓰기'보다 덜 중요한 것으로 여겨왔다. 나는 결국 글쓰기로 진짜 중요한 삶이 아닌 '글쓰기보다 덜 중요한 삶'을 써야 하는 문제에 맞닥뜨린다. 나는 덜 중요한 것을 쓰려고 작가가 되었나? 덜 중요한 것을 쓴 글을 읽고 감동을 받을 독자가 있을까? 아니, 그보다 나는 그 글을 쓰면서 감동을 느낄 수 있을까? 글을 쓰는 시간이 내게 충만함과 기쁨을 줄까? 결국 나는 글을 쓰겠다면서도 정작 글의 원천인 삶은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치부해 온 게 아닌가?      


글과 삶의 관계는 오묘하다. 좋은 글을 쓰려면 분명 책상 앞에 몇 시간씩 앉아있어야 한다. 하지만 내가 마주한 삶을 진지하게 대하지 않으면 진실한 글을 쓰기가 어려워진다. 무작정 열심히 산다고 좋은 글이 나오는 것도 아니다. 내가 그동안 몇 번 넘어지며 배운 교훈은 좋은 글의 소재는 많은 사람들이 선망하는 화려하고 붐비는 곳이 아니라 매일같이 이어지는 평범한 내 삶에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내 삶에 세심한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내가 어떤 마음으로 일상을 대하고 있는지, 만들어가고픈 삶의 모습은 어떤 것인지, 나와 맞닿아 있는 일상이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자꾸만 물어야 한다. 내가 마주하고 있는 생활을 내 안으로 끌어안을 수 있을 때, 멀찍이 떨어져 구경하지 않고 삶으로 풍덩 뛰어들 때, 나는 살아서 펄떡이는, 생생한 글을 쓸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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