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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증

by 아르페지오

퇴사한 지 10개월 만에 다시 회사에 다녀왔다.

어느 날 갑자기 지인이 아르바이트를 하나 하지 않겠냐고 연락을 해왔다. 사용자 대상으로 오프라인 세미나를 잡아 놓았는데 프리세일즈 팀과 일정을 미리 조율하지 않아서 세미나를 진행할 사람이 없다고 했다. 이미 사용자들에게 공지를 해서 날짜를 바꿀 수는 없는 상황이라 잘 모르는 외부 강사가 진행하는 것보다 내가 하면 좋을 것 같아서 연락을 했다고 말했다.

선뜻 내키지 않아서 생각해 보겠다고 하였다. 그런데 나의 동료가 끈질기게 나를 설득했다. 평일 저녁에 하는 세미나라서 사무실에는 세미나 관련자 밖에 없을 것이고 아무도 마주치지 않을 거라 했다. 이전에 밥 먹듯이 하던 일이니 따로 준비할 것도 없을 테고 심심할 텐데 놀러 오는 셈 치고 한 번만 아르바이트를 해보라며 끈질기게 말했다.


결국에 그에게 설득당한 나는 성심껏 세미나를 준비했다. 제품을 사랑하는 소수의 사용자 대상으로 하는 세미나였고 이십 년 동안 내가 매일같이 사용하고 강의했던 제품에 대한 애정이 남아있었기에 최선을 다했다.


프리세일즈 업무 중에서 제품을 사랑하는 사용자를 만나는 것은 최고로 즐거운 일이다. 보여주는 기능마다 호응을 해주고 심도 있는 질문이 나오니 신이 나서 한 시간 내내 신들린 것처럼 떠들어댔다. 잊고 있었던 나의 프리세일즈 DNA가 살아나서 강의 시간을 초과하면서까지 이 기능, 저 기능을 보여줬다.

질문을 하면 구두 답변만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바로 기능을 보여주니 참석자들도 좋아했고 나의 동료는 엄지를 치켜세웠다. 본사에서 출장 온 직원 한 명도 참관했는데 그가 감탄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참석자들의 질문이 끊이지 않아서 예정된 한 시간을 훌쩍 넘기고 두 시간 넘게 진행된 후에야 진행자가 겨우 마무리해서 세션을 끝냈다.


아쉬워하면서 퇴장하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나는 왜 내가 잘하고 좋아하는 일을 그만둔 것일까? 이렇게 신나게 할 수 있는 일이 내 업이었는데 나는 왜 회사를 나가야 했을까? 이런 생각들이 떠올라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사무실에 다시 가니 잊었다고 생각했던, 내게 상처가 되었던 많은 것들이 물밀듯이 머릿속으로 들어왔다. 은퇴했으니 다 끝났고 용서했다고 생각했는데 그저 덮어두고 있었던 것이었다.


매일 새벽에 하는 108배를 하면서 나의 마음을 들여다보았다. 10개월이나 지났는데도 이렇게 아픈데 대체 언제쯤이면 상처가 아물 수 있을까? 용서하고 잊어야 마음의 평온을 찾을 수 있을 텐데 아직도 그 경지에 다다르지 못했구나.


괜한 짓을 한 것 같다.

그냥 못한다고 거절하고 말 것을 괜히 좋아하던 일을 다시 해서 생채기를 끄집어냈다.

이렇게 또 얼마나 더 아파야 할지, 얼마나 더 절을 해야 마음의 평온을 얻게 될지, 바보 같은 짓을 한 나에게 화가 난다.




덩굴나무는 교목을 휘감아서 교목이 섭취해야 할 태양광, 수분, 영양분을 모두 빨아들이고 결국 교목의 생명을 위협하는 정도까지 이르게 한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후에야 덩굴나무가 뒤덮어서 앙상하게 말라가고 있는 교목이 보였다. 남아있다가는 말라비틀어져 버릴 것 같아서 뛰쳐나왔는데 아직도 이런 미련이 남아 있었다니, 상처가 아물려면 시간이 더 필요한 것 같다.

덩굴나무가 뒤덮어 버린 교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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