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개발자와 외국계 IT 기업 프리세일즈로 25년 근속한 후 은퇴하였다.
25년 회사 생활을 하는 내내 대한민국 방방곡곡을 다녔고 다양한 경험을 많이 했다. 그것이 내가 일복이 많기 때문인지, 아니면 내가 다닌 회사, 혹은 나의 커리어(개발자, 강사, 프리세일즈)가 특이했기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동료들 또는 친구들과 이야기해 봐도 유별나게 특이한 에피소드들이 많은 것 같아서 그 기록들을 적어보려고 한다.
개발자로는 겨우 3년 남짓 일했는데 개발자의 삶은 혹독하고 가혹했다. 아니 개발자로서의 삶이 혹독하고 가혹해서 3년 만에 개발자를 그만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의 첫 직장은 대기업 연구소였고 나는 그곳에서 현업에서 사용하는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현장에 갈 때마다 나보다 평균 스무 살은 많은 현업 직원들은 어린 나를 깔보고 무시했다. 연구직이라 연구를 하는 줄 알고 입사했는데 하필 배정된 부서가 연구소에 단 하나 있는 개발 부서였던 것이다. 같이 입사했던 백여 명의 동기들과 인사부 직원들은 나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우리 팀이 개발하는 시스템은 본사 수익과 직결되는 것이라 프로그램의 오류는 수천만 원, 혹은 수억 원의 손실로 이어졌다. 코드 한 줄만 잘못 건드리면 전국에서 사용하는 시스템 장애가 발생하니 항상 긴장 속에 살았다. 임신해서 배가 산만해질 때까지 전국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시스템 점검과 현장 테스트를 했다. 현업 시스템 개발은 너무 힘들어서 부서를 옮겼더니 이번에는 또라이 팀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연구를 하고 논문만 쓰는 것이 지겨웠던 팀장은 난데없이 군부대 위치 추적 시스템을 개발하겠다고 나섰다. 다시 전국 방방 곡곡의 군부대를 돌아다니면서 시스템 개발을 했다. 나의 동기들은 연구를 하고 논문을 쓰고 학회에 발표를 하러 다니고 있는데 좀처럼 경험하기 힘든 부서 두 곳을 거친 후 나는 개발자를 그만두기로 했다.
경력 3년 차가 되었을 때부터 여기저기 원서를 냈지만 서류 전형에서 번번이 탈락했다. 90년대에는 애 딸린 유부녀는 채용 기피 대상이었다. 수십 개의 이력서를 낸 후 겨우 한 곳에 합격이 되었는데 나를 받아 준 곳도 정상적인 회사가 아니었다. 외국계 회사의 교육부라 안정적일 줄 알았는데 독불장군 같은 부서장이 말도 안 되는 사업을 벌여놓고 있었다. 부서장이 그 꼴이니 이곳저곳에서 굴러 들어온 이상한 인간들만 모여 있었다. 사무실에서 고성이 오가며 유리 재떨이가 날아다니는 것을 목격한 후 눈물을 훔치며 다짐했다. 어떻게든 여기서 2년만 버티고 다른 회사로 가겠다고. 3년 만에 개발자를 그만뒀는데 또다시 그만두면 이젠 어느 곳에서도 나를 받아주지 않을 거니 일단 버틸 수밖에 없었다.
하루하루 날짜를 새 가며 정확히 730일을 채우고 다른 외국계 기업으로 이직을 했다. 이름은 꽤 알려진 회사였지만 지사의 직원 수는 겨우 4명, 제대로 된 사무실도 없이 오피스텔 한 칸을 임대해서 사용하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엔 자유롭고 일하기 좋은 회사 같았지만 이곳에도 문제가 도사리고 있었다. 회사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지사장, 일을 할 줄 몰라서 우왕좌왕하고 있는 프리세일즈 동료, 경력도 없으면서 무서울 정도로 기가 센 마케팅 과장, 그리고 나, 이렇게 네 명이 꾸려가는 회사생활은 파란만장했다.
우여곡절 끝에 지사장이 교체되고 무능력한 직원이 해고되고 회사가 정상적으로 굴러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떻게 하다 보니 세 번째 회사에서 20년 넘게 근속하게 되었다. 세 번째 회사에서의 처음 10년은 즐거웠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입사한 후 엉망진창이었던 2년을 제외하고 그 이후 십여 년 동안은 즐겁게 일했다. 좋은 상사와 좋은 동료들을 만났고 의욕과 열정이 넘쳤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경력 20년 차가 되었을 즈음 다시 위기가 오기 시작했다. 4명으로 시작한 회사가 어느덧 50명이 넘는 규모로 커졌고 팀원이었던 동료와 후배들은 팀장이 되고 승진도 해서 쭉쭉 뻗어 나가는데 이상하게 나는 매번 진급에서 미끄러졌다. 처세술이 부족해서 그런가 해서 술도 마셔보고 골프도 배워보고 발버둥을 쳤지만 아무도 내 손을 잡아주지 않았다. 이직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수험생인 아이의 뒷바라지를 해야 했기에 이직은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렇게 지옥 같은 3년을 버텼고 아이가 대학에 진학한 후 이직을 시도했다. 이곳저곳 닥치는 대로 지원했지만 한 곳에서만 연락이 왔고 그 단 한 곳의 회사에서도 통화 목소리를 듣더니 여성인지 몰랐다며 황급히 전화를 끊었다. 사십 대 후반의 여성 엔지니어를 채용하려고 하는 회사는 세상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제야 실감했다. 내게 남은 선택지는 이 회사에서 버티던지, 아니면 그만두던지 둘밖에 없다는 것을.
어떻게 지켜온 커리어인데 이렇게 쉽게 포기할 수는 없었다.
다시 힘겨운 버티기가 시작되었다. 1년을 버티고 2년을 버티고 그리고 3년을 버티다가 회사에서 입사 20주년 기념식을 열어주던 날, 퇴사를 고했다.
다칠 데로 다쳤고 상처가 날 데로 나서 너덜너덜해졌기에 아쉬움은 없었다.
오히려 시원했다.
2021년 12월, 25년 동안 처절하게 버텨 온 나의 IT 일대기는 끝이 났다.
몇 년이 지난 후 뒤돌아보면 이 좋은 회사에서 제 발로 걸어 나온 것을 후회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지금은 진작 그만두지 왜 그렇게 생채기가 날 때까지 버텼던 것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스물다섯 살인 우리 아들은 엄마와 같은 길을 가려한다. 소프트웨어 개발자가 되겠다며 열심히 취업 준비를 하고 있는 아들을 바라보며 응원을 해야 할지 다른 길을 가라고 설득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부디 다음 세대들은 조금 더 나은 세상에서 일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25년 IT 고군분투기 기록을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