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발자로 일하면서 주 7일 근무와 야근에 지쳐서 외국계 IT 회사로 이직을 했다. 그런데 외국계 회사라고 모두 근무 환경이 좋은 것은 아니었다. 너무 급하게 이직을 하느라 알아보지 않고 회사를 옮긴 것이 문제였다.
나의 두 번째 회사는 미국 IT 회사였고 부서는 교육 사업부(Euducational Service)였다. 교육부서는 아이를 키우면서 일하기에 좋을 것 같았고 적어도 야근은 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내린 결정이었다. 그런데 출근해서 맞닥뜨린 현실은 생각했던 것과는 딴판이었다.
이 회사는 자바라는 기술로 시장을 선도하던 기업이었고 교육 사업부는 자바 개발자 교육과 국제 공인 자격증으로 앉아서 돈을 끌어모으고 있었다. 부연 설명을 하면 1990년대 말은 IT 업계의 호황으로 인해 개발자 몸값이 치솟던 시절이었다. 이러한 추세 때문에 사무직에서 개발자로 전환하려는 수요가 폭발하였고 비전공자들의 자바 국제 공인 자격증 취득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었다. S사 교육 사업부는 자격증 교육으로 역대 최고의 매출을 올리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국제 공인 교육을 하려면 미국 본사의 매어 까다로운 절차를 통과해야 했다. 자바라는 기술을 개발한 본사에서는 자바 언어를 개발하거나 자바 개발 과정에 참여한 우수한 인재들이 만든, 세상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훌륭한 교재들이 시리즈로 출간되었고 이 교재를 사용하여 교육을 하는 강사는 본사에서 주관하는 Master Instructor 시험을 반드시 통과해야 했다.
Master Instructor 시험은 두 단계로 이루어져 있는데 1단계는 본사에 가서 해당 교육 과정을 수강하는 것이고 2단계는 T3라는 Train The Trainers 수업을 수강하고 Master Instructor 앞에서 강의를 한 후 강의 평가 테스트를 통과하는 것이었다.
이 과정을 새로운 교육 과정이 나올 때마다 반복해야 했는데 우리 부서에는 수 십 명의 프리랜서 강사가 있었지만 정규직 강사는 한 명도 없었다. 프리랜서 강사들을 해외로 출장을 보내서 Master Instructor 자격증을 취득하는 것은 여러 가지 면에서 제약이 있었다. (프리랜서 강사들은 영어를 잘하지 못했고 직원이 아닌 외부 인원을 출장을 보내서 비용을 처리하는 것 또한 쉽지 않았다.) 이런 제약 때문에 국내에서 개설할 수 있는 교육 과정에 한계가 있었다. 과정 하나만 개설하면 수천만의 매출을 올릴 수 있는데 이 기회를 놓치기 싫었던 교육부 수장은 직원 한 명을 뽑아서 모든 교육 과정의 Master Instructor 자격증을 따오게 한 후 강사들을 교육시키면 된다는 말도 안 되는 방법을 생각해 냈다. 그리고 그저 직장을 빨리 옮기고 싶었던 내가 덜컥 그 덫에 걸려들었던 것이다.
채용 과정에서 들었던 설명은 프리랜서 강사들을 관리하고 가끔 직접 강의를 하면 된다고 했는데 가끔 하는 강의가 이런 것이었다니. 그제야 알아보지도 않고 급하게 이직한 나의 실수를 깨달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첫 직장에는 이미 사표를 냈고 다른 회사를 구하기엔 나의 조건이 별로 좋지 않았다. (90년대 후반 어린아이가 있는 워킹맘은 대놓고 면접에서 탈락시키던 시절이었다.)
다른 곳으로 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니 이를 악물고 버텨냈다. 주 7일 근무와 야근에 지쳐 아이 얼굴이라도 보려고 이직했는데 이제는 전 세계를 떠도느라 잠든 아이 얼굴을 보는 것조차 어려웠다. 그러나 버티는 것 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입사 한 지 일 년이 되었을 때 헤아려보니 1년 동안 총 7개의 Master Instructor 자격증을 땄고 1년의 1/4 이상을 해외에서 보냈다는 것을 알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게 주어진 일은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자바 웹 프로그래밍, 엔터프라이즈 자바 빈즈 등의 다양한 과정들이 있는데 매번 새로운 과정이 나올 때마다 본사에 가서 잘 들리지도 않는 영어로 교육을 들어야 했다. 그다음 주에는 밤새워 공부해서 Master Instructor 시험을 봐야 했다. 본사의 가이드라인은 교육 과정을 충분히 숙지한 후에 Master Instructor 시험을 보는 것이었지만 항공권 비용이 아까웠던 나의 상사는 매번 한 번의 출장으로 모든 것을 끝내라고 했다.
Master Instructor 수업을 듣는 수강생 중에 평균 2~3명은 통과하지 못했다. 미국 강사 지망생들은 떨어져도 전혀 걱정을 하지 않았고 다음에 다시 도전하면 된다고 말했다. 그들의 매니저들도 Master Instructor 시험을 한 번에 통과할 거라고 기대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나의 상사는 달랐다. 출장을 승인하면서 시험에 떨어지면 내가 받게 될 비난을 미리 했고 두려웠던 나는 매일 밤을 새워서 모든 시험에 악착같이 통과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미국 한번 가 본 적 없던 내가, 영어로 교육 한번 들어 본 적이 없던 내가 어떻게 그 모든 것을 해냈는지 모르겠다. 그때는 무언가를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고 그저 앞만 보고 달렸다.
그렇게 일 년에 8~9번의 출장으로 미국, 영국, 싱가포르, 일본 등 세계를 누비며 다녔지만 공항, 호텔, 교육장을 제외한 다른 곳을 다닌 적이 없다. Master Instructor 시험에 통과하려면 밤새 공부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항상 시간에 쫓겼기 때문에 호텔은 교육장에서 가장 가까운 곳으로만 예약했고 모든 식사는 호텔 안에서 해결했다. 2주 혹은 3주 간의 출장이 끝나서 시험을 통과하고 나면 하루 정도 시내를 돌아보고 싶은 유혹도 있었지만 엄마를 찾는 아이 생각에 항상 당일 저녁에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돌아가곤 했다.
그렇게 2년 동안 전 세계를 누비고 다니며 취득한 12개의 Master Instructor 자격증과 5개의 국제공인자격증을 지니고 세 번째 회사로 이직을 했다. 더 이상 이렇게 해외로 떠돌면서 살고 싶지 않았다. 상사는 투자한 금액이 얼마인데 2년 만에 이직을 한다며 저주를 퍼부었다. 조근조근 나의 모든 미래를 저주하던 그의 얼굴이 아직도 생생하다.
지금의 나라면 그런 말도 안 되는 부당함을 참고 견디지 않았을 텐데 스물여덟의 나는 왜 아무 말도 하지 못했을까?
내가 퇴사한 이후에 내가 맡았던 직책은 없어졌다. 공고를 냈지만 아무도 지원하지 않았고 프리랜서 강사들을 출장 보내는 것으로 타협했다고 한다. 그 소식을 듣고 매우 씁쓸했다. 2년 동안 내게 주어진 일은 불가능한 일이었다는 것을 퇴사 후에야 알게 되었으니까.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게 되면 직장생활을 잘 설계해야 한다. 지금의 나라면 아이가 서너 살 일 때 이렇게 해외 출장이 많고 스트레스 강도가 높은 회사는 절대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요즘 늦게 결혼을 하고 늦게 엄마가 되는 되는 후배들이 부럽다. 그들은 많은 것들을 경험해 보고 많은 것들을 누려본 후 현명한 엄마가 된다. 남들은 오십도 되기 전에 아이를 다 키우고 대학에 보낸 내가 부럽다고 하지만 얻은 것이 있으면 잃은 것도 있기 마련이다. 그들이 많은 것을 누린 이삼십 대에 나는 많은 것을 희생했다.
요즘 세상엔 1년에 10만 마일의 출장이 별 것 아닐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난생처음 가 본 미국의 후미진 도시에서 내비게이션도 없이 지도를 보며 헤매던 경험은 너무나 혹독했다. 이십 년이 지난 지금에도 껌껌하고 어두운 밤, 끝도 없는 도로에서 길을 잃고 느꼈던 두려움이 또렷이 기억난다.
빨리 결혼해서 애를 다 키운 것이 부럽다는 사람들의 말에 나의 처절했던 삼십 대 시절이 생각나서 기억을 꺼내보았다.
모든 일에는 일장일단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