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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군대 가 봤어? 난 군대에서 일해봤어.

군부대에서 파견 근무한 여성 개발자 이야기

by 아르페지오

나는 대학에서 컴퓨터 공학을 전공하고 석사 과정을 수료한 후 취업을 했다. 컴퓨터 공학을 전공하는 6년 내내 코딩을 많이 했고 코딩이 적성에 맞는 줄 알았다. 그래서 석사 과정을 마친 후 대기업 연구소에 개발직 연구원으로 취직을 했다.


당시 내가 취업한 기업은 공기업에서 민간 기업으로의 전환을 준비하고 있는 기업의 연구소로 현업에서 몇 년 후, 혹은 몇십 년 후에 사용할 기술을 연구하는 곳이었다. 나는 이곳에서 3년 동안 연구원으로 일했는데 3년 내내 특이한 부서에 배치되어 다양한 경험을 하였다.


첫 번째 부서는 현업에서 사용하는 시스템을 개발하는 부서였다. 현업에서 사용하는 시스템을 개발하니 지방 출장이 많았고 모든 업무에서 한치의 오류도 허용되지 않아서 신입 사원인 내가 버터내기가 힘겨웠다. 업무가 힘들고 험하다 보니 십 년 차 이상의 베테랑들로만 구성되어 있었고 선배들도 신입사원이 왜 이 부서에 배치되었는지 이상하다고 할 정도였다. 팀장님과 상의 끝에 겨우 새로운 부서로 배치를 받았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더 힘든 부서로 가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무도 가지 않으려고 하는 부서로 덜컥 옮겼던 내 잘못이었던 것 같다.


두 번째 부서에는 젊고 의욕이 넘치는 팀장님이 있었다. 그는 공기업의 이미지를 탈피하여 새로운 비즈니스를 창출해 보겠다는 부푼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우리 회사가 앞으로 주력해야 할 사업으로 SI(System Ingetration)를 선택했다. 언변과 영업 능력까지 출중했던 팀장님은 소프트웨어 개발 프로젝트라곤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우리를 위해 군부대에서 진행하는 프로젝트를 수주해 오셨다. (팀장님에 대한 글은 https://brunch.co.kr/@arpeggio/180를 참고하면 된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 팀의 어느 누구도 소프트웨어 개발(SI) 프로젝트를 수행해 본 경험이 없다는 것이었다. 우리 회사는 연구소였고 팀원 모두 석사 혹은 박사 과정을 마치고 연구원으로 채용된 사람들이었다. 그들 모두 연구 과제를 수행하고 논문을 쓰거나 보고서를 작성하는 업무만 수행해 왔으며 개발 프로젝트는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우리는 하루아침에 개발사가 탈바꿈해야 했다. 그것도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고객 중 하나인 군부대를 대상으로 하는 프로젝트를 수행해야 했다.


당시 신입사원이었던 나는 선배들이 시키는 일만 하고 프로젝트의 작은 부분만 담당해서 세부적인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사업은 초기부터 삐끗거렸다. 미팅을 할 때마다 고객은 실현할 수 없는 요구 사항들을 추가했고 의욕이 넘치는 팀장님은 모든 요청을 수용해서 들고 왔다. 겨우 열 명 남짓한 팀원들은 매일 밤을 지새워야 했고 쫓기는 일정에 주 7일, 일 년 365일, 하루도 쉬지 못하고 출근을 했다. 끝이 없는 야근과 스트레스로 모두가 피폐해져 갈 무렵 팀원 한 명이 사무실 한가운데에서 과로로 쓰러졌다. 그리고 그날 나는 퇴사를 결심했다. 끝도 없는 야근과 휴일 근무를 도저히 견뎌낼 수 없었고 미래는 없다고 생각했다. 사무실 한가운데에서 쓰러져서 구급차에 실려가는 선배의 모습이 몇 년 후의 내 모습일 것만 같았다.

이렇게 대기업 연구소에서 3년 만에 퇴사하였고 도망치듯 외국계 기업으로 옮겼다. 내가 프리세일즈라는 업종으로 들어오게 된 경로는 단순했다. 개발자의 삶이 너무 고단했고 힘들었다. 가정이 있고 어린아이를 돌봐야 했기에 저녁이 있는 삶을 살고 싶었는데 내 손을 잡아주는 곳이 그곳밖에 없었다.


퇴사하기 직전 입사 3년 차일 때 현장 테스트 및 의견 수렴을 위해서 몇 달 동안 군부대 파견 근무를 하게 되었다. 벌써 이십여 년이 넘은지라 정확한 부대명은 기억나지 않지만 서울 어딘가에 있는 부대였고 부대로 매일 출근해서 일주일에 한 번씩 높은 분에게 시연을 했다. 시연 후에는 사용자들의 피드백을 받아서 현장에서 바로 시스템을 수정했다. 한 달 넘게 부대에 상주하며 일을 해야 했기에 군인들과 같이 짬밥을 같이 먹었다. 처음에는 남자들만 가득한 군부대에서 여자인 내가, 그리고 군인도 아닌 외부인이 줄을 서서 짬밥을 먹는 것이 불편해서 도시락을 싸가거나 점심을 건너뛰기도 했다. 그런데 격무에 시달려 여유가 없어지자 아무 생각 없이 줄을 서서 짬밥을 먹었다. 어색함과 불편함에 처음에는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았지만 하루하루 익숙해져 갔고 생각보다 맛있는 짬밥에 만족하면서 그렇게 한 달여의 시간을 보냈다.


세월이 흘러 우리 아들이 군대를 갔고 부모 초대 행사가 있어서 군부대에서 아들과 함께 짬밥을 먹게 되었다. 짬밥을 먹으면서 이십여 년 전 추억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지으며 먹었다. 견과류에 과일까지 갖춰진 고급진 짬밥을 먹으면서 이십여 년 전 내가 먹었던 짬밥보다 훨씬 맛있다고 했더니 아들이 깜짝 놀랐다. 군부대 프로젝트를 했을 때 짬밥을 먹어 봤다고 했더니 아들이 엄마는 회사 생활에서 재미있는 경험을 많이 한 것 같아서 부럽다고 말했다.


스물일곱의 나는 군부대에서 파견 근무를 하는 것이 정말 힘들고 무서웠는데 아들에게는 재미있는 경험이라니. 지금에서야 고백하자면 나는 맨날 화만 내는 부대의 높으신 분이 무서웠다. 그분이 나타나면 우리뿐만 아니라 부대의 모든 사람들이 긴장하는 것이 보였고 그분이 뭐라고 쏟아내고 가면 일이 산더미 같이 쏟아졌다.

그리고 무책임한 팀장님이 미웠다. 고객과의 약속을 조율하지 못하고 질질 끌려다니기만 하면서 우리의 할 일을 산더미 같이 불리기만 하는 무능력한 그가 정말 싫었다.


그런데 이십여 년이 지나고 나니 군부대 프로젝트를 했던 때가 가끔 기억난다. 군부대에 상주하면서 개발을 해 본 여성 개발자가 몇 명이나 있겠는가 싶기도 하고 전국 방방곡곡에 있는 군부대에 가서 군용 지프차를 타고 현장 테스트를 했던 경험들이 아주 재밌고 소중한 추억으로 떠올랐다.


프로젝트는 성공하지 못했다. 처음으로 SI 프로젝트를 하는 우리 회사와 이상이 너무 높았던 고객은 간격을 서로 좁히지 못했고 프로젝트는 2년 차, 3년 차에서 점점 더 힘든 상황으로 치달아서 실패로 끝났다고 들었다. 그러나 힘들었던 이 경험 덕분에 나는 남자 동료들이 군대 이야기를 할 때 같이 나눌 수 있는 이야깃거리를 가지게 되었다.


회식 자리에서 혹은 사석에서 나의 동료들이 군대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면 난 이렇게 말한다.

"넌 군대 가봤니? 나는 군대에서 일해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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