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첫 직장은 대기업 연구소였다. 직원 수가 만 명이 넘는 큰 회사였고 내가 입사했을 당시 사기업 전환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공기업 냄새를 풀풀 풍기고 있었다. 당시는 취업이 잘되던 시기라 3~4 개의 회사에 합격했는데 관공서 느낌을 풀풀 풍기는 이곳보다 다른 회사가 더 끌렸다.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안정적이고 큰 기업이 좋을 것 같다는 부모님의 조언에 따라 이곳을 선택하였다.
입사 후 해외 연수까지 이어졌던 3개월간의 신입 사원 교육은 나를 설레게 하였다. 좋은 기업에서 내 꿈을 펼칠 수 있을 거라 생각했고 부푼 꿈을 안고 배치된 팀으로 출근을 했다. 모든 팀원들이 반갑게 환영해 주었고 특히 나를 반기던 선배 연구원 한 명이 있었다. 그녀는 내게 급하게 알려줄 업무가 있다며 나를 탕비실로 데리고 갔다.
부서에 배치된 첫날 당장 습득해야 한다는 급한 업무는 팀장님의 커피를 타는 것이었다. 손님이 올 때마다 팀장님과 손님에게 커피를 타서 가져다 드려야 하는데 지금까지 경력 10년 차 연구원 선배가 이 일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대학원까지 졸업하고 연구원으로 입사를 했는데 팀장님 커피 심부름을 해야 한다니 충격을 금할 수가 없었다. 너무 놀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지만 출근 첫날 지시받은 업무를 못하겠다고 할 배짱 또한 없었다.
그날부터 나는 손님이 오실 때마다 촌스런 꽃무늬 커피 잔에 커피를 타서 팀장님 방으로 들고 갔다. 익숙하지 않으니 커피를 타서 팀장님 방으로 갈 때마다 심장이 벌렁벌렁했다. 연구원으로 취직한 내가 왜 이런 일을 해야 하는지 하소연을 하고 싶었지만 어디에 호소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박사 과정까지 수료한 여자 선배들도 내가 커피 심부름을 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행동했다.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커피 심부름을 하는 것이 억울했지만 지지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부당함을 호소할 용기도 내지 못했다.
그 후 몇 개월 후에 우리 팀에 계약직 사원이 배치되었다. 앞으로는 이 사람이 부서의 문구류 등의 주문, 비용 처리 등의 업무를 해주면서 팀장님 커피 심부름도 담당할 거라고 했다. 모든 부서에 이런 업무를 하는 계약직 사원이 한 명씩 있는데 내부 사정으로 우리 부서에만 담당 직원 배정이 되지 않았던 것이라고 했다.
우리 부서에 배정된 계약직 직원은 나와 동갑이었다. 그녀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바로 취업을 해서 벌써 경력 7년 차였고 프로그래밍 전공을 해서 개발 업무도 일부 수행하였다. 분명 개발 업무를 하라고 뽑은 사원일 텐데 그녀의 주요 업무는 온갖 잡다한 일이었다. 영수증 처리, 문구류 주문, 커피 심부름, 그리고 누가 해야 할지 불분명한 모든 잡다한 일들이 그녀에게 주어졌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 불평을 하지 않고 언제나 생글생글 웃으면서 그 모든 일들을 해냈다.
동갑인 그녀와 나는 금세 친해졌다. 신입이라 어리벙벙한 나를 7년이나 선배인 그녀가 살뜰하게 챙겨주었다. 동갑이라 그런지 대화도 잘 통했다. 그러나 선배들은 내가 그녀와 친하게 지내는 것을 못마땅하게 바라보았다. 대놓고 지적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불편한 시선이 느껴졌다. 그러나 우리는 신경 쓰지 않고 어울려 다녔다.
부서의 온갖 잡다한 일을 담당했지만 그녀는 항상 밝았다. 모든지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씩씩한 그녀로부터 나는 참 많은 것을 배웠다. 회사 생활을 하면서 꼭 가입해야 하는 보험이나 개인연금, 그리고 직장인 대출까지, 그리고 팀장님과 부장님의 갑작스러운 지시에 대처하는 방법 등 그녀는 모르는 것이 없었다. 내가 다른 회사로 이직한 후에도 우리는 종종 만났는데 육아와 일에 치여 정신없이 살다 보니 그녀와 연락이 끊겨버렸다.
신입 사원이었을 때 팀장님 방에 커피를 타서 가지고 갈 때마다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 팀장님은 가끔 업무에 관한 질문을 하시기도 했고 커피 맛이 이상하다고 타박을 하시기도 했다. 신입사원이었던 나는 업무에 대한 질문이 나오면 어쩔 줄 몰라서 당황하기 일쑤였고 커피 맛에 대해 타박을 받으면 더 당황했다. 하기 싫은 마음을 누르며 억지로 만든 커피가 맛이 있을 리가 없었을 것이다. 커피 심부름 때문에 몇 개월 동안 너무 힘들었는데 그녀가 나타난 후 모든 것이 해결되었다. 그녀는 모든 일을 똑 부러지게 해냈다. 기존 직원들과는 나이 차이가 10년 이상 났던 부서에서 그녀는 나에게 유일한 친구이자 동료였다. 25년의 직장생활을 회상하다가 문득 그녀가 보고 싶어졌다. 그리고 내가 느꼈던 부당함을 그녀는 어떻게 감당했을지 헤아리지 못했던 것에 대해 미안한 마음이 든다. 동갑이었는데 단지 나보다 직장생활을 먼저 시작했다는 이유로 나는 그녀에게 의지하기만 했던 것 같다. 커피 심부름은 나의 업무도 그녀의 업무도 아니었는데, 부당한 일은 바로 잡았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던 나 자신에 대해서 자책을 하게 된다.
시커먼 결제 서류철과 촌스런 꽃무늬 찻잔으로 기억되는 나의 첫 직장,
신입 사원을 뽑아서 3개월씩 교육을 시키면서 해외 연수까지 보내던 기업,
그곳에서 내가 제일 처음 배운 업무는 팀장님의 커피를 타는 법이었다.
커피 하나, 프림 둘, 설탕 하나를 넣으라며 시범을 보여주던 선배의 모습이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