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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르페지오 Nov 04. 2023

감정의 유효 기간

나의 MBTI는 ISFJ이고 혈액형은 B형이다. 혈액형별 성격을 맹신하진 않지만 나도 모르던 자신을 파악하는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반면 MBTI는 꽤 정확하게 나를 투영해 주는 것 같다.


B형은 규율이나 규칙을 싫어하고 감정으로 움직이는 자유인이라고 한다. 직설적으로 말하면 감정적이고 다혈질이라는 의미이다. 지인들끼리 혈액형을 공유할 때 B형이라고 하면 흠칫 놀라는 표정을 많이 보았다.


 ISFJ는 MBTI 유형 중 가장 정의 내리기 어려운 유형이라고 한다. 성격에 모순적인 부분이 많기 때문에 완전하게 이해하기 힘들며 자기 자신도 본인의 성격을 모르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인정하긴 싫지만 B형과 ISFJ 모두 이성보다는 감정이 먼저 발동하는 유형이다. 오랫동안 아니라고 우겨보았지만 이제는 나의 내면에 감정적이고 즉흥적인 면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이런 성질머리로 25년이나 회사를 다녔으니 별아 별일이 있었다. 욱하는 성질을 참지 못하고 상사에게 대들었다가 부당한 처우를 받기도 했고 사무실 한복판에서 동료에게 언성을 높인 적도 있다. 다행히 다혈질 성질이 자주 발현되는 것은 아니라서 이런 일은 아주 드물게 발생하는데 더 큰 문제는 시간이 지나면 뼈저리 후회를 한다는 것이다. 참다 참다 결국 화를 냈는데 내가 더 힘들고 불편해진다는 것이 나의 문제이다.


그래도 이십 년 넘게 회사 생활을 하면서 욱하는 성질을 조금 다스릴 줄 알게 되었다. 감정적인 성격 때문에 후회할 일을 만들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했기 때문이다. 요즘은 평온한 일상을 지내고 있어서 화낼 일이 별로 없었는데 감정을 다스려야 하는 일이 생겨서 글을 써서 내 마음을 다독여보려고 한다.


강의를 시작해서 한창 바쁠 때 아르바이트 제의를 받았다. 전에 다니던 회사에서 업무 의뢰를 받았는데 두 가지 일을 한꺼번에 하려면 버거울 것 같긴 했지만 놓치기 아까운 제안이라서 수락을 했다.


강의와 아르바이트로 갑자기 바쁘게 지내다 보니 시간은 정신없이 흘렀고 별일 없이 잘 진행되고 있는 줄만 알았다. 그런데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지 두 달 정도 지났을 즈음 황당한 이메일을 받았다.


아르바이트로 하는 일은 업무가 명확하게 정해진 것은 아니고 내게 일을 요청한 A  팀장의 업무를 돕는 것이다. A 팀장의 업무에 부하가 걸려서 그를 잠깐 도와줄 사람을 파트타임으로 고용한 것이라 A 팀장과 일주일에 한 번씩 미팅을 하고 주간 업무 지시를 받아서 일을 했다. 지시받은 업무를 수행한 시간을 기록하고 주간 보고서를 보내서 주별로 업무 확인을 받았고 월에 한 번씩 취합된 보고서를 보내서 보수를 받는 형태였다. 그런데 문제는 예산은 다른 팀에서 집행되어서 일을 의뢰한 A 팀장이 아닌 B 팀장에게 한 달에 한 번씩 결산 보고서를 보내고 보수를 받아야 했다.


내게 업무를 맡긴 사람은 잘 알던 지인이고 그와는 매주 미팅을 하고 업무 공유는 수시로 하고 있으니 별다른 문제가 없는 줄 알았다. 그런데 예산을 승인하는 B 팀장이 갑자기 나의 모든 업무에 대해 딴지를 걸고넘어진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나의 월별 보고서의 모든 줄에 빨간색으로 밑줄이 그어져서 되돌아왔다. 자세한 내역을 제공하라, 이 일은 왜 했느냐, 그리고 심지어 하지도 않은 미팅을 했다고 적었다며 의심하는 내용까지 있었다. 내가 보고서만으로는 B 팀장이 모든 업무를 파악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억울해서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을 꾹 누르고 몇 시간 동안 자료와 이메일을 뒤져 가면서 일일이 해명을 달아 보냈다. 상세하게 설명과 근거자료를 보냈지만 그 이후로 B 팀장으로부터는 아무런 회신도 받지 못했고 지난달 보수 또한 입금되지 않았다.


2주 넘게 회신을 기다리면서 잠들어 있었던 다혈질 성격이 끓어올랐다. 멋지게 bye bye라고 이메일을 보내고 당장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짜 보고서를 써서 돈을 받아내는 사기꾼 취급을 당하면서까지 일을 하고 싶지 않았다.


나에게 일을 의뢰한 직원은 중간에서 난처해서 쩔쩔매고 있다. 그는 나를 믿고 일을 맡겼으니 내가 중도에 그만두면 A 팀장에게도 타격이  것이다. 그러나 이런 취급을 받으면서까지 일을 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아니 도저히 일을 계속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은퇴한 마당에 보람을 느끼지 못하고 즐겁게 일할 수 없다면 그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이 현재의 판단이다. 그러나 감정적인 내가 충동적으로 결정을 내리지 않도록 일주일만 더 기다려 볼 생각이다.




모든 감정에는 유효 기간이 있다. 사랑에도 유효 기간이 있고 분노에도 유효기간이 있다.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은 일종의 분노 또는 화이고  감정의 유효기간은 3주이다. 이 감정이 가라앉아서 이성적으로 판단을 할 수 있도록 3주를 기다리려고 한다.


무참하게 빨간색 줄이 그어져 있는 이메일을 받은 지 2주가 지났다. 그동안의 경험 상 나는 아직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일주일만 더 기다려서 내 감정이 가라앉은  나의 결정을 통보하려고 한다.


회사 생활을 하면서 감정을 다스리는 방법을 배웠다.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이 감정적인 상태로 큰 결정을 내리는 것이라는 것도 배웠다. 동료와 언쟁을 한다던지, 상사에게 대든다던지 등의 행동은 언제나 나에게 불이익을 초래했다. 참고 또 참는 성격 때문에 평생 서너 번 밖에 없었던 일이지만 아직까지도 후회하고 있는 이기도 다.


이전에 했던 실수를 반복해서 3주를 채우지 못하고 감정적인 이메일을 쓸 것이 두려워서 글로 남겨 놓는다.

오늘부터 카운트 다운을 시작해서 일주일을 채운 후 담당자에게 이메일을 보내려고 한다.


계약직의 서러움이 이런 것이구나 싶다. 만약 내가 이 돈으로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나는 월세를 못 내거나 식비를 충당하지 못하고 있었을 것이다. 보고서를 더 자세하게 쓰지 않았던 나의 부주의함도 뉘우친다. 아무리 잘 아는 사람이 맡긴 일이라도, 시간이 많이 걸리더라도 보수를 받기 위한 보고서는 더 신경 써야 했던 것 같다.


너무 상처받지 말고 모든 것이 서툴러서 생긴 일이라 생각해보려고 한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고 인생에 대해 또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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