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센코노믹스, 인간의 행복에 말을 거는 경제학
부 제 : 아마티아 센, 기아와 빈곤의 극복, 인간의 안전보장을 이야기하다
지은이 : 아마티아 센 (*최신 표기는 아마르티아 센)
옮긴이 : 원용찬
출판사 : 갈라파고스
출간일 : 2008년 6월 25일
사 양 : 204쪽 / 142ⅹ198mm
오랜만에 밤늦도록 책을 봤더니 조금 출출하다. 밥 해 먹기는 귀찮고 배달 음식 먹기엔 돈이 아까우니, 라면을 끓여 보자. 물은 라면 봉지의 조리법에 쓰인 그대로 정확히, 면과 수프를 넣고 끓이다 2분 지나서 달걀 하나, 막바지 30초 전에 파와 콩나물 살짝. 오늘은 여느 때보다 더 잘 끓인 듯하다. 이제 TV 앞 탁자에 냄비 받침을 깔고 맛있게 먹을 일만 남았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TV 속 첫 영상으로 유니세프 홍보 광고가 나온다. 아이들은 도저히 먹을 것이 없어서 우리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한다. 탱탱한 면발을 입속에 넣기가 괜스레 미안해진다. 우리는 손쉽게 라면 하나 끓여 먹을 수 있는 반면, 이 아이들은 왜 배고픔에 허덕여 먼 나라 사람의 도움이 아니면 아사해야 할까? 우리에겐 라면이 있고 그들에겐 라면이 없기 때문일까?
대부분의 우리는 이렇게 대답할지 모른다 ─ “아마도 라면... 때문이겠지?” 우리에겐 부엌 선반 어딘가에 사 놓은 라면이 있고, 없으면 바로 사 올 수 있는 마트가 근처에 있고, 계산대를 빠져나올 수 있는 얼마간의 돈이 있다. 유니세프의 아이들에겐 이 정도조차 없다. 그들은 라면조차 가질 수 없는, 흔히 말하는 ‘빈곤’한 사람들이므로 라면을 소유한 우리가 그들에게 ‘라면’을 주면 문제는 일단락 해결될 것이다.
대부분의 원조는 빈곤 상태에 있는 사람들에게 부족한 물자를 직접적으로 제공하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여기에서 빈곤은 소득 수준이 생존에 필요한 기초적인 재화를 구입·획득할 수 있는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들에게 ‘라면’을 지속적으로 공급한다면 그들은 죽음 같은 배고픔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런데, 누군가 건네주는 ‘라면’을 먹으며 하루하루 살아가는 삶을 우리는 정말 빈곤하지 않은 삶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센코노믹스』의 저자 아마르티아 센은 이렇게 대답한다 ─ “문제는 ‘라면’이 아니다!” 센 교수는 라면이 아닌 ‘권리’에 주목한다. 우리가 라면을 구입해서 끓여 먹을 수 있는 이유는 그럴 수 있는 기본적인 권리를 보장받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인류는 60억 인구가 충분히 먹을 수 있는 식량을 생산해 내고 있다. 절대적 빈곤을 해결하기에도 생산량이 부족했던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우리는 식량을 비롯하여 생존에 필수적인 재화를, 나아가 그 이상의 가치를 추구하는 재화를 충분히 생산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주체가 스스로의 목적에 알맞은 재화 및 서비스를 정당하게 획득·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해당 사회가 보장해주느냐의 문제이다.
아마르티아 센 교수는 이와 같은 권리를 ‘인타이틀먼트(entitlement)’라고 정의한다. 유니세프 광고 속 아이들이 기아 상태에 직면한 이유는 그들이 속한 사회가 그들의 식량 인타이틀먼트를 제대로 보장해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부에서 적절히 분배하지 못하는 식량 물자를 외부에서 일시적으로 지원해 주는 구호 활동도 물론 필수적이다. 그러나 그들의 인타이틀먼트를 보호하는 사회 안전망이 구축되지 못한다면, 그 이후의 지속 가능한 인적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기아는 더 이상 ‘라면’의 부재가 아니다. 센 교수의 표현대로 기아는 ‘권리 박탈’이다.
빈곤의 개념도 같은 맥락에서 재고해야 한다. 유니세프 광고 속 아이들과 우리 중 더 가난한 쪽은 한 끼에 목숨이 걸려 있는 그 아이들이다. 그렇다면, 그들과 우리 중 더 뛰어난 사람은 누구일까? 이 질문의 답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그 누구와도 다른 자신만의 적성과 능력을 가지고 태어난다. 이것은 우열의 차별이 아니라 고유한 차이이다. 따라서 사람에게는 자신의 고유한 ‘잠재 능력’에 따라 자기 충족적인 삶을 추구할 권리가 있으며, 사회는 사람의 근본적 인타이틀먼트를 마땅히 존중하고 보호해 주어야 한다. 『센코노믹스』에 의하면 빈곤은 “잠재 능력을 키울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하는 상태”(41쪽)이다. 그 아이들이 우리보다 더 빈곤하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근본적인 이유는 ‘라면’조차 스스로 구할 수 없는 상황보다는 사람으로서의 삶을 살아갈 기회조차 마땅히 보장받지 못하는 환경에 있는 것이다.
더부룩한 생각을 함께 먹은 탓에 밤늦은 라면을 소화시키기엔 이미 늦은 것 같다. 그래도 우리에겐 아직 한 입이 남았다 ─ 우리 사회는 정말 ‘빈곤’에서 벗어났을까? 배려받고 존중받아야 하는 사람으로서의 권리와 자신의 잠재 능력을 정당하고 자유롭게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우리 사회는 얼마만큼 보장해 주고 있을까? 『센코노믹스』는 물질적 재화의 평등이 아니라 “기본적 잠재 능력의 평등”(35쪽)을 제안한다. 결국 빈곤은 기본적 잠재 능력의 ‘불평등’이다. 그리고 우리는 어렴풋이 혹은 꽤나 또렷이, 누군가의 권리가 불평등하게 박탈당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아직 빈곤할지도 모른다. 지금까지의 세상이 전부 우리의 책임만은 아닐 테니까. 그러나 앞으로의 세상은 먼저 이 세상에 태어난 우리의 책임이다. 아마르티아 센 교수는 ‘경제학의 양심’으로 불린다. 양심. 우리는 어쩌면 그것을 밤늦은 시간 손쉽게 끓여 먹을 수 있는 라면쯤으로 여기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