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도망가겠습니다] 이선영
- 나 1월에 여행 가. 근데 약간 도망 여행같은 거.
- 도망? 여행? 어디로 가는데?
- 구례!
- 아니, 왜 도망을 구례로 가는데?
구례로 도망가기로 결심하고서 가장 많이 들은 말이다. 왜 ‘구례’냐는 말. 구구절절 설명하자니 말이 길어질 것 같아 ‘그냥’이라는 쓰임새 좋은 단어로 대충 설명을 했다. 근데 ‘온나’에서는 구구절절해도 될 거 같으니까 그 시작부터 끄집어 내어봐야겠다.
간절하게 도망 가고 싶은 날에 김새봄으로부터 ‘도망가자’는 말을 듣고 눈물을 쏟아낸 얘기는 프롤로그에서 했으니 이 얘기는 그 다음부터다.
프롤로그_도망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찾아온 동행 : https://brunch.co.kr/@leesy0304/2
마지막 한 움큼 남은 눈물을 혀뿌리 뒤로 삼켜 넣으면서 물었다.
- 그럼, 그래서, 그럼 우리 어디로 도망갈 건데?
김새봄은 처음엔 제주도, 강원도 같은 몇 군데 지역을 말했다.
제주도는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섬나라 아일랜드를 닮아 좋아하는 곳이다. 바다라곤 손톱만치도 눈에 담기지 않는 곳에 서있어도 비릿하고 달큰한 바다 냄새와 바닷물 위의 축축함이 바람에 실려온다. 마음이 내킨다면 금방이라도 그 바람이 이끄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겨 바다를 만날 수 있다. 그 바람은 사람의 발걸음만 움직이게 하는 게 아니라서 구름도 변덕스러이 움직이고 비를 내린다. 이리저리 바다를 굴러다니다 자리잡은 돌들이 많다. 따수운 사람들이 처음 듣는 말씨로 어디서 왔냐고 말을 붙인다. 이게 둘 사이에 자리 잡은 공통점이다. 그래서 난 아일랜드를 사랑하고 제주도를 좋아한다.
강원도는 멋진 동해 바다를 끌어안고 있는 강릉과 속초 지역이 있어서 좋아하는 곳이다. 바다로부터 좀 떨어져 있기는 하지만 동해 바다가 있는 경주와 포항에서 나고 자란 나는 동해 바다를 좀 편애하는 편이다. 서해 바다에게는 미안하지만 거칠은 파도 거품 치는 검은 돌벽을 보고 있자면 ‘역시 바다는 동해 바다지!’를 연신 외치게 된다. 그런 바다를 하루종일도 볼 수 있는 곳이라니 내가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나. 그리고 그 곳에서 즐길 수 있는 해산물에 술 한잔은 날 천국으로 데려다 줄 보너스다.
그런데 그냥 도망의 장소로는 걸맞지 않게 느껴졌다, 사람이 너무 많은 곳이니까. 나는 사람으로부터도 도망치고 싶었다.
나에게 있어 결국 어떤 장소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만드는 것은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이긴 하지마는.
‘사람이 너무 많은 곳이니까.’에 공감해준 김새봄 덕분에 우리는 다시 행선지를 고르는 고민에 기꺼이 행복하게 빠질 수 있었다.
이 부분에서 잠깐 기억에 대해서 해야 할 얘기가 있다. 기억이란 참 알량해서 보통 그 기억의 소유자 멋대로 편집되어 남곤 하는데 내가 딱 그렇다. 나는 우리 보성으로 수학 여행 갔던 거 기억해? 난 그 수학여행이 너무 좋았는데 거기 다시 가볼까? 하다가 비슷한 느낌으로 차밭이 있는 하동 얘기가 나왔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김새봄은 섬진강을 가자고 했다가 화개장터와 하동 얘기가 나왔던 것으로 기억했다.
내 기억이 틀렸다 한들 지금의 내가 기억하는 그 때의 기분은 그러하니 그런대로 이야기를 해나가되 김새봄의 기억이 궁금하신 분을 위해 링크를 걸어두었다. 이유없이 어떤 대상에게 사랑을 쏟을 수 있는 큰 마음 한 땀 한 땀이 담긴 글이다. 그곳으로 가는 길을 슬쩍 틔어 놓는다.
이유없이 좋은 곳 혹은 그런 사람(섬진강에 가자고 했던 김새봄의 이야기) :
https://brunch.co.kr/@leesy0304/3
나와 김새봄은 고등학교 때 친구이다. 전교생이 채 100명이 되지 않던 초등학교의 병설유치원에서 만나 초등학교 졸업까지 함께했으나 중학교를 따로 간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가 자기 따로 간 중학교에서 만난 친구가 나와 같은 고등학교에 가게 되었다며 소개시켜 주었다. 그렇게 만날 수 있었던 친구다.
이 친구는 여행의 시작에서 자신을 꼭 닮은 책 한 권을 선물로 줬는데, 그 긴 얘기는 다음으로 남겨두겠다.
김새봄과 나는 고등학교 2학년, 수학여행을 갈 시기가 되었을 때 같은 반도 아니었는데 한 버스를 타고 여행을 할 수 있었다.
우리 학교에서는 수학여행에 있어 약간 독특한 시스템을 돌렸는데, 수학여행지를 선택할 수 있는 거였다. 근데 그건 어쩌면 약간이 아니라 조금 많이 독특했었는지 우리 학년을 시작과 마지막으로 돌아갔었다. 아무튼 우리는 그 시스템의 수혜자였으니 좋은 일이다. 학기 초였나, 아무튼 수학여행 전에 학년 전체를 대상으로 설문을 했다. 어떤 곳으로 수학여행을 가고 싶은지. 45인승 버스를 얼추 채울 수만 있으면 그 곳을 수학여행지로 편성해주겠다는 거였는데 ‘제주도, 서울, 남해’가 그 선택지였다.
당시에 우리 반 애들은 좀 뭐라 해야 될까, 몇 몇의 주도로 형성된 단합력이 치덕치덕하던 분위기였는데 바로 그 몇 몇이 ‘우리 반은 남해로 가자!’라고 외쳤다. 그 몇 몇과 미묘하게 복잡한 트러블이 있었던 나는 그 말에는 따르고 싶지 않았던 것 같은데 ‘남해’에는 진짜 가고 싶었던 것 같다. 나는 한 번도 안 해본 걸 해보는 걸 진심으로 애정하는 사람인데 그런 나에게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남해’는 진심으로 매력적이었다. 정확한 기억은 나지 않지만 정황 상 내가 이런 마음을 털어놓았을 때 나의 모든 사정을 알고 있던 김새봄이 ‘어? 그럼 나랑 같이 가자.’라고 해줬던 것 같다. 또 이건 알량한 기억 속의 내용이기 때문에 김새봄한테도 다시 물어봐야겠다. (김새봄이 맞다고 했다.)
그렇게 순천, 합천, 보성 같은 곳을 버스 하나 타고서 여행했는데 그 중에서도 보성에서의 기억은 아직도 상당히 강하게 남아있다. 나는 뭐 하나에 꽂히면 좀, 뭐랄까 다 알아야 직성이 풀린다. 어떤 노래에 꽂히면 그 가사 음절 하나 하나 다 뜯어 먹어야 되고, 어떤 물건에 꽂히면 그것의 기원까지 알아야 된다. 고등학교 시절 동안 내가 꽂혀있던 것 중에 하나가 녹차였다. 김새봄은 우리의 첫 만남에서 먹었던 티라미수를 기억하고,
우린 순식간에 아주 오래 알던 사이인 것 처럼 웃고, 쉴 새 없이 떠들다 씁쓸한 코코아 가루를 화분 심은 자리의 흙 마냥 여기저기 흩뿌려가며 서로의 포크가 맞닿는 것도 신경쓰지 않은 채 티라미수를 나눠 먹었다.
/ 01. 이유없이 좋은 곳 혹은 그런 사람(김새봄, 온나)
나는 김새봄이 추천해줬던 그린티 라떼를 기억한다.
내가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이 시작되던 날 자퇴를 한 탓에 학창시절을 함께 보낸 기간을 길지 않지만 점심시간을 사이에 두고 연강으로 이어지던 수학시간이 시작 되기 전, 급식을 거른 채 교실에 단 둘이 앉아 당시 빠져있던 녹차맛 아이스크림을 베어먹으며 선영이 지독하게 좋아하던 조용필의 신곡을 무한 반복재생 하던 기억이 그 시절의 대부분이다.
/ 위의 글
그리고 우리는 책상 하나를 두고 앞뒤로 앉아 녹차마루를 먹으며 떠들어 댔다. 나는 내키면 녹차마루 세 개를 사와서 마지막 녹차마루가 녹을까 걱정하면서 두 개를 정말 빠르게 헤치우고서 마지막 그것을 여유롭게 먹곤 했다.
그런 나한테 처음 본 녹차밭은 열여덟 인생에 충격이었다. 이렇게 맛있는 게 이렇게 멋있는 곳에서 온다니! 싶은 충격.
우리는 녹차밭 한 이랑 이랑 사이를 뛰어 다니고 냄새 맡고 만지고 사진을 찍었다. 그 때 찍은 사진이 한 장도 없는 게 너무 아쉽다. 그리고 하얀색 종이컵에 짜주던 녹차맛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보성을 얘기했을 때 김새봄이 그러면 여기는 어때? 하면서 하동 얘기가 나왔던 것 같은데 김새봄은 섬진강 때문에 하동을 얘기한 건데 이 때 나는 보성의 녹차밭이 머릿속에 가득 차있어서 녹차밭 때문에 또 다른 녹차밭이 있는 하동이 나온 줄 기억하고 있었나보다.
섬진강 시인이라 불리기도 하는 김용택 시인을 좋아하는 엄마의 손에 이끌려 하동에 가서 재첩국을 먹은 기억이 나름 따스하게 남아있었기 때문에 나에게는 마다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또 아주 흐릿한 기억만이 남아있어 다시 가본다면 어떤 기억이 덧씌워질까 하는 생각에 그저 좋았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이 없는 자리에 푸릇한 차밭이 가득하고 새하얀 모래섬을 타고 흐르는 강물이 있는 곳으로 가기로 했다.
눈치 채셨을지.
아직도 ‘아니, 왜 도망을 구례로 가는데?’라는 물음에는 답하지 않은 것을.
그건 숙소 때문이었다.
우리는 관광객이 아니라 도망자들이었기 때문에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의 공간으로 섞여 들고 싶어 에어비앤비를 켜놓고 그 곳에 녹아들어 있는 숙소를 찾고 있었다. 정말 그 조건에 딱 맞는 숙소를 찾았다. ‘섬진강 지리산이 좋아 짐싸서 내려와 살고 있는 시골살이 8년차’라는 문구가 반겨주는 숙소였다.
그 숙소가 하동 옆 구례에 있어서 구례로 가기로 했다.
어차피 구례도 ‘사람이 없는 자리에 푸릇한 차밭이 가득하고 새하얀 모래섬을 타고 흐르는 강물이 있는 곳’이었기 때문에 별반 달라질 건 없었다. 하동보다는 구례가 좀 더 사람이 없으니까 더 적당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결국 도망의 날짜도 그 숙소가 예약이 되는 날로 잡았다. 위치시스템 상 하동이랑 가까우니 그 옆에 같이 있는 구례의 숙소도 같이 띄워준 것 같은데 고마울 따름이다. 어디론가 떠난 여행의 길에서 만난 숙소 중에 몇 손가락 안에 들 숙소를 만날 수 있었으니까.
기쁘게도 우리의 숙소 자랑은 끝 없이도 할 수 있어서 새로운 지면을 빌리기로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