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을 흐르게 두자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라는 책이 2000년 전후로 우리 집에 있었다. 누가 샀는지는 모르겠는데 별생각 없이 책을 몇 장 넘겨보았던 것 같다.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라는 주문이 오히려 코끼리를 생각하게 한다는 것! 정말 코끼리를 생각하지 않게 하려면 코끼리를 언급하지 않는 프레임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괜히 코끼리를 언급하면 계속해서 그 주제에 함몰되기 쉽다는 것.
태국 여행 때 코끼리 등에 타 본 적이 있는데 코끼리는 귀가 약점이었다. 귀에 날카로운 채찍의 흔적이 난무했다. 귀가 너덜거릴수록 더 힘들게 이 생활에 적응했다는 거였겠지. 코끼리 사파리를 하다가 눈물이 났다. 한편으론 귀가 깨끗한 코끼리도 있었다. 내가 탄 코끼리에 비하면 작았는데 아마도 이곳에서 낳아지고 자란 듯했다. 보면서 일제강점기에 태어난 강점기둥이 - 영화 모던보이 같다고 생각했다. 이런 곳에서 나고 자라면 그래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적응할 수 있겠구나. 사람의 나고 자란 자리가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꼈었다.
내가 그의 먹잇감이 아니기에 영역에 가까이 가거나 해치려들지 않으면 나를 돌덩이 보듯 할 것 같은 말도 안 되는 확신의 느낌이 들어서일까. 무섭지 않고 귀엽게 바라봐지는 듯하다. 무리 지어 사는 모습이 가정적이고 화목해 보이는 것도 한 몫한다. 다른 사람들도 비슷하게 느끼기 때문에 동물원에서 사파리에서 코끼리는 구경의 대상이 되겠지.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나는 종종 나의 귀여움과 사랑스러움으로 점철 지어지는 것들에게 미안하다. 나는 이렇게 그것들을 소비하고 있구나. 나는 귀엽고 사랑스러움을 내 위주로 해석할 때마다 받고 싶은 사랑과 주고 싶은 사랑의 차이를 더 깊이 느낀다.
요즘따라 더 주고 싶은 사랑과 받고 싶은 사랑 사이에서 힘들다. 아이들과 더 많이 이야기하고 싶고 더 많이 시간을 보내고 싶은데 게임이라는 벽에 가로막힌다. 일찌감치 아이들에게 게임이라는 한도 없는 카드를 준 나를 원망한다.
가정적이고 화목하며 아이들의 자연스러운 독립과 사회 구 성원의 하나로 잘 크기 바라는 엄마의 마음은 매번 게임이라는 허들 앞에서 게임 때문에 게임 그만하라고 게임이 모든 것들의 악의 축과 근원으로 탈바꿈한다. 게임을 적절하게 하고 가정 안에서 지내는 방법을 고민하다 보면 나는 그릇이 작아서 내가 가진 것보다 더 헌신해야 하고 더 시간을 쏟아야 하고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포기해야 한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그러다 어느 순간 아이들에게 내가 헌신하고 포기한 것들이 이만큼인데 왜 너희들은 따라오지 않냐고 한탄하고 원망한다. 이 악순환을 끊어내야 하는데...
언니랑 오랜만에 통화를 했다. 언니는 한결 편해진 것 같아서 나도 같이 편해졌다. 언니는 내 갈길을 잘 가면 아이들이 그것을 보고 배울 것이라고 너무 아이들에게 직접적으로 다 채워주지 말라고 했다. 알 것 같은데.. 아는 것 같은데.. 아는데.. 막상 실현해 내는 것은 어렵다.
그래서 코끼리를 생각했냐고? 당연히 코끼리가 생각난다. 내 무의식은 미국인이 아니라 민주당이 아닌 따뜻한 태국에 사는 코끼리를 생각했고 코끼리를 소비하는 나에 대해 생각하고 이미지를 소비하며 내가 주고 싶은 사랑과 받고 싶은 사랑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아이들에 대해 생각했다. 진짜 코끼리든 정치적인 코끼리든 생각을 움직이려고 노력한다. 이게 심리학적으로 어떤지는 잘 모르겠다. 그저 생각과 감정에 덜 매몰되려고 노력했다. 슬픔도 기쁨도 즐거움도 패배감도 무기력함도 환희도 모두 다 순간임을 안다. 굳이 그 감정을 유지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감정은 나를 스쳐 지나감을 안다. 그럼에도 내가 가치 없거나 무시당한다는 생각이 들면 빠져드는 불안감과 패배감과 속상함은 아직 극복하지 못한 산이다.
나는 전생부터 인간관계에 적응하지 못한 인간이었다. 이번 생애에도 인간관계는 어렵고 험난해서 누군가의 채찍질과 스스로의 채찍질 사이에서 울고 웃고 포기하고 또 희망을 갖는다. 사파리에서 마주한 코끼리의 귀를 본다. 살기 위해 너덜너덜한 귀를 갖게 된 코끼리가 위안이 된다. 나도 살기 위해 이런 거라고 뾰족한 언어 하나쯤 박히도록 두어도 된다고... 말이다.
그래서 생각이 미니멀되었냐고? 그럴리는 없다. 나만의 긍정적이고 부담 없는 코끼리들만 만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