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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읽는산타 Feb 19. 2024

미운 놈에게 주는 떡 하나

그 안에 태풍 몇 개, 천둥 몇 개

드라마 고려거란전쟁 속 현종은 강조의 정변으로 인해 급작스레 왕위에 오르게 된다. 정치라고는 눈곱만큼도 몰랐던 현종이기에 신하들의 쏟아지는 발언과 공세에 나오는 답변은 하나였다.



"그래, 그리하시오"



아는 바가 거의 없고 경험도 하지 않았기에 신하들의 의견을 맹목적으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신하들 중 최고는 단연 정변을 일으킨 강조였다. 강조는 거의 왕과 같은, 아니 실질적으로 왕보다 더 높은 권력을 손에 쥐고 현종을 쥐락펴락했다.






이 장면에, 그리고 이 드라마에 이리도 몰입이 되는 이유는 초반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현종의 모습에서 나의 모습이 일부 오버랩됐기 때문일 것이다.



나도 정말 급작스레, 얼떨결에 행정실장이란 자리에 가게 됐고, 근심과 걱정 속에 시달리다 출근을 하게 됐고, 나보다 잘 아는 선생님들 틈에서 이리저리 치였고, 강조와 같은 기가 센 선생님과도 어떤 일을 겪게 됐다.



초식공룡과도 같은 생각과 행동으로 출퇴근을 반복했고, 자신감이 날로 하락하고 있던 와중에.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마인드와 어릴 때부터 장착된 투철한 책임감을 갖고 끊임없이 철학책을 읽으며 문제를 해결하려 발버둥 쳤다.



반복의 힘이었을까. 어디에선가 나도 모를 용기가 샘 솟아났고, 반복을 거듭하던 생각이 행동으로 나올 수 있었다. 정말이지 그때와 비슷한 상황이었다.



"실장님, 잔디깎이 기계에 연료가 다 떨어져 버렸네요."


"아 그래요? 그럼 휘발유를 사서 와야겠네요?"


"네, 말통에 담고 오면 될 거 같아요."


"네, 그럼 그렇게 하세요."


"그런데, 차가 모닝이라 말통이 안 들어갈 것 같은데 실장님이 좀 다녀와 주세요."



이와 같은 마지막 발언에 예전같이 힘없는 목소리로 "네? 제가요?"라고 반응을 했으면, 틀림없이 이전과 같은 결과가 나왔을 것이 틀림없었다. 분명 예전과 같이 쏘아 붙임을 당했을 터였다.



그래서 이번에는 조금은 다르게 반응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씀을 하세요. 모닝이 아무리 작아도 그 20리터짜리 말통이 안 들어간다니요."



남에게 싫은 소리를 잘 못하는 성격이라, 강도가 전혀 세지 않은 말임에도 불구하고 감정이 조금 섞인 말을 하며 심장이 살짝 두근거렸다.



예전과는 조금은 다른 반응에 조금 움찔했는지, 아니면 하기 싫은 일을 피하려고 둘러댄 핑계가 너무나도 빈약해서 맞받아친 내 말에 다른 둘러댈 이유를 찾지 못했는지.



시설관리 선생님은 알아듣지 못할 말로 말끝을 흐리며 결국 카드를 받아 갔고, 본인이 그 작디작다고 했던 모닝을 끌고 가 휘발유를 사서 왔다.



그 이후로 나는, 정말 말도 되지 않는 이유를 들이면서까지 일을 대신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갖는 선생님에게서 약간의 연민의 감정이 생겨 나왔다.



그래서 화를 내기보다 오히려 '미운 놈 떡 하나 더 주자'는 마인드로 대하는 자세를 취했다.



날씨가 더운데 밖에서 일을 하고 있으면 시원한 물을 가져다주기도 하고, 냉커피를 타서 드리기도 했다. 그리고 어떤 무거운 물건을 들거나 혼자 하기 버거운 일을 할 때마다 옆에서 거들며 함께 했다.



그럴 때마다 시설관리 선생님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미소가 번지는 횟수가 늘어남에 따라 무시하는 것만 같은 말도 점차 사라져 갔고, 부탁하는 일에도 흔쾌히는 아니지만 하려는 모습들이 보이며 나를 대하는 태도가 점차 달라지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그 떡 하나에 신기한 힘이 들어 있는 것만 같이 느껴졌다.



정변을 명분으로 삼아 1년 만에 거란이 고려로 침공해 왔고, 강조는 고려의 대군을 이끌고 거란과 맞서 싸우기 위해 출정을 하게 된다.



강조에 의해 약해질 대로 약해진 현종이었지만. 강조가 출정하기 전 현종을 대면하자 현종은 오히려 부월(왕이 신하에게 하사하는 도끼)을 강조에게 하사하며,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온다면 반역의 죄를 묻지 않겠다고까지 하며 꼭 승리하고 오라는 말로 격려를 한다.



바로 그 장면에서 강조는 자신이 얼떨결에 즉위시킨 현종이 자신이 원했던 군주였음을 깨달으며 눈물을 흘린다.



현종이 강조를 대할 때 '미운 놈 떡 하나 더 주자'는 마음은 분명 없었을지도 모른다. 왕이기에 나라와 백성들을 우선으로 생각해야 했기에, 전쟁에서 이겨야 했기에 그리 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 강조라는 힘이 센 상대에게 당하면서 끝없는 걱정과 고민의 밤을 지새웠을 것이다. 강조가 없었으면, 사라졌으면 하는 마음이 쉴 새 없이 찾아왔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종은 그 밉디 미운 놈에게 자신의 고통과 인내의 나날 속에서 만든 진심 어린 마음이 담긴 떡 하나를 내어준다. 



일평생 그런 마음을 받아본 적이 없었던 것만 같은 것처럼 흘렸던 강조의 눈물은, 자신을 역적으로 바라보는 타인의 시선과 일말의 자책감 속에서 온전히 자신을 따스히 격려하며 인정하고 있는 현종의 손길 때문이 아니었을까.



지금은 작은 할큄에도 생채기가 나는, 마음은 또 웅덩이 같은 작은 행정실의 리더지만 현종의 그릇처럼 그 마음이 넓어져 누군가에게 한 켠의 자리를 내어줄 수 있기를. 



그럴 수 있기를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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