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는 의대생일 때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하고, 간호사는 나이팅게일 선서를 한다.
학부 때 나이팅게일 선서식을 했던 게 생각난다.
간호사는 선의의 의무가 있다. 환자의 생명을 케어하고 보존하기 위해 건강상태를 더 증진시키는 것에
그 목적이 있다. 아빠는 중환자실에서 힘든 시간을 잘 견뎌주었다.
중환자실에서 아빠에게는 참 많은 일들이 있었다.
보통 환자 상태가 변화가 있을 때 보호자에게 전화를 하는데 이번에는 반대 입장으로
걸려온 전화를 받으니 참 이상했다.
전화를 받으니 앞니가 저절로 빠졌다고 했다.
저절로 빠지기란 사실 어렵고, 나중에 아빠 치아를 보니 빠졌다면 이뿌리부터 빠졌을텐데
절단된.. 그런 흔적이 있었다. 그래서 그 치아를 어떻게 할 거냐고 물어보는 전화였다.
그래서 아빠는 현재는 앞니가 1개 없다. 당시는 아빠가 살아나냐 마냐가 중요했기 때문에
치아 빠지는 것보다는 그게 더 우선순위라고 생각했다.
엄마는 가래를 뽑다가 airway(기도 유지를 위해 입에 물게 하는 장치)를 끼는 과정에서 입을 안벌리니까
그런 것 같다며 간호사에게 잘 좀 하지 그랬냐면서 쏘아붙였다고 했다.
물론 그 분들도 선의의 의무에서 그렇게 하셨을 거라고는 생각을 하지만
보호자 입장에서는 너무한... 그래도 살려주셔서 감사하게 생각하고는 있다.
아빠는 하루가 다르게 많이 좋아졌다.
L-tube(비위관을 연결하여 경관식을 투여받는 것), foley(소변줄)를 제외한
나머지 drain(배액관: 아빠는 L-tube, 중심정맥관, 척추관, 소변줄, 동맥라인 등을 갖고 계셨다.)은
전부 제거하게 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일반병동으로 나오는 것인데 곧 그 말은 간병인이 필요하다는 말이기도 했다.
금요일에 전화가 왔는데 당장 토요일날 나온다니 당황스러웠다.
그래서 우리는 간병인을 구할 예정이니 시간을 달라고 했다.
중환자실에서는 약간의 시간을 주었다.
월요일날 중환자실에서 신경외과 병동으로 나오는 걸로 이야기가 됐다.
친척들에게도 아빠의 소식을 전달했다.
감사하게도 아빠의 누나들(고모들)이 대학병원에 입원해있는 동안은 간병 해주기로 했다.
그렇게 아빠는 신경외과 병동으로 나오게 되었고 뇌경색 후유증으로 복시와 어지러움에 시달리게 된다.
고모들은 나에게 아빠 사진이나 근황을 장문의 카톡으로 전송해주었다.
동생이 상품권을 드려도 받지 않으셨다.
당시 엄마는 체면보다는 당장 간병비용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고모들이 아빠를 간병하는 게
베스트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나와 동생, 엄마는 직장에 다니고 있었다.
그런 사정을 알았던 고모들은 아빠보다 나이가 더 많고, 고모들의 건강도 very good이라고
말할 수 없는 상태인데도 동생인 아빠를 돌보러 와주셨다.
나는 평소 고모들과는 연락도 잘 했던 것은 아니라 이 상황이 굉장히 민망하고 미안했다.
고모들에게도 자식들이 있었기 때문에 나의 사촌언니 오빠들, 동생에게 굉장히 미안한 상황.
나라도 내 부모도 아픈데 동생을 간병하러 간다고 하면 싫겠다 싶었다.
다시 아빠로 돌아와서 중환자실에서 신경외과 병동으로 전동했다.
그런데 전동 이후 아빠는 설사를 하기 시작했다.
알고보니 CDT( Clostridium difficile toxin test)에서 양성이 나왔고 그래서 항생제 치료를 했다.
그 때쯤 수술부위 실밥을 제거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봉합이 잘 되었는 지 보기 흉하지 않았다.
그 사진을 보고 나서야 아빠가 그래도 죽음의 문턱은 넘어왔구나 싶었다.
© sharonmccutcheon, 출처 Unsplash
아빠는 일반 병동에서 3주 정도 계셨다.
새해가 시작되는 설날이었는데 고모 반찬을 갖다줄겸 아빠를 보러 갔다.
응급실 통해 입원한 이후 우리는 아빠를 처음 보는 것이었다.
1층 로비에서 휠체어를 탄 아빠를 만났는 데 쓰러지기전(뇌경색 발병전) 아빠 얼굴이 아니었다.
너무나 완연한.. 환자의 얼굴, 내가 그동안 봐왔던 중환자실 환자의 얼굴이었다.
안 그래도 말랐는데 살은 더 많이 빠져서 뼈밖에 없었다.
아직은 어지러워서 걷지는 못한다고 했다. 그 때 당시 아빠는 지금처럼 유창하게 말을 잘하지 못했다.
고모는 일부러 아빠의 기억을 되살려주려고 어렸을 때 이야기도 하고
우리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 당시만 해도 아빠의 엄마(나의 친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것도 잊어버리고 기억이 오락가락 하셨다.
그래서 고모가 아빠의 말을 통역해주는 역할(?)을 했는데 낙상했던 그 날,
이러다 죽겠구나 하면서도 나와 동생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못하고 죽을까봐 너무 무서웠다고 했다.
1인실에 혼자 있어서 너무 무서웠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눈물이 핑돌았는데
고모가 주말 드라마 찍냐면서 농담으로 분위기를 전환했다.
헤어질 때 아빠는 우리에게 사랑한다고 말했고 우리도 사랑한다고 말했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기까지는 시간이 꽤 걸릴 거라고 축적된 경험과 데이터가 말해주고 있었다.
그래도 이만하길 천만다행이다 싶었다.
© dariamamont, 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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