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책_겨울] 아홉 번째 이야기
재작년 여름, 한동안 '미니멀 라이프'에 빠진 적이 있다. 일본의 유명한 정리 컨설턴트인 곤도 마리에가 쓴 <인생이 빛나는 정리의 마법>을 읽고 난 뒤였다. 그 뒤로 간소한 삶을 추구하기 위해 집안 여기저기에 쌓여 있던 안 쓰는 물건들을 버리기 시작했다. 처음 시작은 옷. 곤도 마리에는 옷부터 시작해서 책, 서류, 소품, 추억이 들어간 물건 순으로 정리하고 버리라고 한다. 처음부터 추억이 들어간 물건을 정리하면 추억에 빠져 허우적대다가 결국 아무것도 정리하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고. 옷부터 정리하라는 말에 옷장을 들여다봤다. 10년이 지나도록 입지 않은 옷들이 쌓여 있었고 김장 봉투로 5 봉투가 나온 옷들은 정리하고 팔아버리자 마음이 개운해졌다. 옷 다음은 책, 그리고 각종 종이. 그러다 강적을 만났다. 바로 오랜 기간 써온 다이어리들.
곤도 마리에는 말한다.
"설레지 않으면 버려라."
중학생 때부터 쓴 일기장과 다이어리들. 곤도 마리에의 법칙에 다이어리를 대입해보았다. 다이어리를 펼쳐보면 그 당시의 나로 돌아간다. 즐거웠을 때, 힘들었을 때, 행복했을 때. 그 모든 순간이 다이어리에 적혀 있었다. 설레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버리기에는 내가 다이어리에 적어온 일상들이 없어지는 것 같았다. 그동안 곤도 마리에를 잘 따랐지만 이번만큼은 내 마음을 따르기로 했다. 다이어리들은 다시 서랍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뭔가 석연치 않았다.
작년 연말, 나는 여느 때처럼 내년에는 어떤 다이어리를 살까 고민하고 있었다. 연말에 누릴 수 있는 즐거움 중 하나였다. 문득 버리지 못하고 서랍 속에 고이 모셔둔 다이어리들이 생각났다. 서랍에는 이미 많은 다이어리가 있다. 내가 내년에 40살. 80살까지 산다고 하고 매년 1권의 다이어리를 쓴다고 하면 지금 있는 다이어리에 40권이 추가된다. 혹시라도 내가 갑자기 죽게 된다면 아이가 이걸 어떻게 처리할지 난감할 것 같았다. 재작년부터 추구하는 '미니멀 라이프'와도 상충했다. 고민하다 버리기와는 다른 전략을 쓰리고 했다.
바로 디지털로 옮기기
마침 작년부터 노트 앱인 '노션'으로 독서 노트와 1년 동안 해야 할 일들 리스트를 관리해오던 터였다. 업무일지도 이미 '노션'으로 쓰고 있었다. 업무를 보기 위해 매일 같이 노트북을 켜고 일을 하므로 기록도 수월할 것 같았다. 그렇게 작년 말부터 디지털로 옮기기 위한 나의 준비를 시작하였다. '노션'에 나의 일 년 계획을 쓰고, 언제 어떻게 무슨 일을 할지 기록하기 위한 템플릿을 만들었다. 템플릿을 만드는 데 3일 정도 온전히 나의 시간을 쓴 것 같다. 그렇게 완성된 나의 다이어리 템플릿! 온라인상에 깔끔하게 옮겨진 나의 일상들이 볼 때마다 나를 기분 좋게 했다. 이제 노트북에서, 핸드폰에서 나의 일상들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노션'은 다른 노트 앱에 비해 다양한 템플릿을 제공하고 있고, 디자인도 예뻐서 다이어리 꾸미기 못지않은 뿌듯함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펜을 손에 쥐고 필기하는 그 감촉은 버리기 아쉬웠다. 그래서 아이패드와 오랫동안 옷장 안에서 잠자고 있던 애플 펜슬을 꺼내 감촉을 느끼고 싶을 때는 애플 펜슬로 써보자고 다짐했다.
일본의 정리 컨설턴트 곤도 마리에는 말한다.
설레지 않으면 버려라.
나는 말한다.
버리지 못하면 디지털로 바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