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을 돌려 드립니다. 이미 많은 분들이 리마인더를 쓰고 계실 겁니다. 스마트폰에 내장된 어플과 사회서비스망(SNS)이 알려줍니다. 내가 올렸던 글, 찍었던 사진, 다녀갔던 곳 등 N년전 추억을 친절히 알려줍니다. 이렇게 제공받은 자료를 통해 잠시 추억에 젖죠.
저희 리마인더는 좀 달라요. 우선 스마트 기기나 앱이 아닙니다. 예전에 많이 쓰던 탁상용 자명종 모양입니다. 뒤쪽 초록색 버튼을 누르기 전에는 그냥 탁상시계입니다. 시간을 확인하고 알람을 맞추고 끕니다. 초록 버튼은 추억 리마인더 모드로 바꿔줍니다.
리마인더 기능으로 전환되면 하늘색 시계 화면이 하얗게 변합니다. 왼손 검지 손가락으로 콧기름을 세번 바른 후 흰색으로 변한 전면부에 갖다 대면 추억이 소환됩니다. 시곗바늘이 사라진 하얀 화면에 무언가 나타나는데 글자일 수도 있고 영상일 수도 있습니다. 사진이나 그림, 소리일 수도 있고 드물게는 냄새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되떠오르는 기억, 추억
추억은 무얼까요? 쫓을 추追, 생각 억憶, 말 그대로 우리가 쫓는 생각입니다. 왜 쫓습니까? 그립기 때문입니다. 왜 그립습니까? 지난번 그리움 숙성 냉장고를 소개하면서도 말씀드렸지만 그리움은 현재를 버티는 에너지원입니다. 과거를 떠올려야 지금 살기가 수월해지는 셈이죠.지금의 피로를 잊는 방편이기도 합니다. 여행이 일상을 돌아보게 해주는 것처럼 과거 여행은 현재를 재평가해 줍니다.
많은 사람들이 추억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한낱 지나간 일에 대한 회상이라 여기죠.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나를 스쳐갔던 기억을 추적하는 일은 내가 누군지, 내가 어디로 가는지와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처럼 추억을 가벼이 여기는 사람은 성찰의 힘도 부족합니다.
물론 고속 세절기로 잘라버리고 싶은 기억도 있습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떠올리는 것이 유리한 기억이 더 많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아있기 때문이죠. 살아있는 한, 우리 각자는플러스섬(plus sum)입니다. 모든 살아있는 존재는 과거의 총합인데 플러스니까 생존해 있는 것입니다. 가령, 나비가 있다고 칩시다. 이 나비라는 존재는 알과 애벌레와 번데기의 합계입니다. 알, 애벌레, 번데기라는 각 과정을 지나온 것이 아닙니다. 그 모든 시간의 합계가 바로 나비입니다.
가치중립의 추억
스마트폰이나 사회서비스망이 주기적으로 알려주는 리마인드 서비스는 반쪽 짜리입니다. 왜냐하면 내 활동을 다시 복기시키는 것이기 때문이죠. 일종의 동어반복이고 순환참조입니다. 저희 제품은 랜덤입니다. N년전 당신이 올린 게시물과는 상관없습니다. 물론 아하 그랬지 싶은 것들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한참을 떠올려야 겨우 떠오르는 것들일 겁니다.
너무 어려서 지금의 두뇌에 남아 있지 않은 기억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무심코 뱉은 말이나 부지불식간의 행동이 cctv 화면처럼 재생되기도 하고, 언젠가 경험했던 유쾌하거나 불쾌했던 소리나 냄새가 나오기도 합니다. 이 제품을 개발하면서 저도 많은 추억을 선물 받았습니다.
한 번은 국민학교 2학년 때 맡았던 냄새가 떠올랐는데 그것은 친구네 집에 놀러 가서 맡은 냄새였습니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데 그 애가 방과 후에 놀자며 데려간 집은 놀랍게도 논 한가운데 덩그러니 자리잡은 비닐하우스였습니다. 당시 저는 경기도 광명에 살았었는데 그때만 해도 본격적인 개발 전이라 건물보다 논과 밭, 산과 들이 더 많았습니다.
추억 리마인더가 다시 맡게 해 준 냄새는 오묘했습니다. 그 비닐하우스 집의 땅(흙바닥이었어요), 한쪽 구석 찬장에서 흘러나오던 음식, 한가운데 곤로 속 석유, 나무로 대충 만든 간이침대 위 솜이불... 그 모든 것이 섞인 냄새였습니다. 나는 그가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당혹감을 내색하지 않으려고 애썼던 노력, 집안 흙바닥에 부딪히던 구슬 소리, 개구리알을 잡으러 나가자는 그 애의 제안, 꽃샘추위 속에 겨우 몇 가닥 핀 개나리 따위가 수십 년을 건너 다시 내게 왔습니다.소환된 이 기억은 지금 제게 무슨 의미일까요?
살았던 그대로 살아갈 우리
사람은 안 변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습관이나 언행, 성격은 바꾸기 어렵습니다. 아무리 잘못됐다고 생각해도 스스로를 사랑하는 것 이상으로 불만스럽지는 않기 때문이죠(어떤 면에서 우리 모두는 나르시시스트입니다). 추억도 마찬가지입니다. 저장과 망각으로 인해 드나드는 기억은 조금씩 달라지겠지만 쫓는 방식은 그대로입니다.
저희 발명품인 기억 소환 리마인더는 당신의 현재와 미래를 바꿔 주는 기계가 아닙니다. 단지 흘려보냈던 과거와 다시 조우하게 하고 지금을 환기시키는 기능을 합니다. 추억의 총합이 지금의 당신이므로 이 리마인더로 당신의 존재를 더 풍성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다음번에는 소울푸드 3D 쿠커를 팔러 올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