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절단해 드리는 기계입니다. 종이 세절기와 비슷합니다. 기억을 영구적이고 불가역적으로 삭제합니다. 가로, 세로, 높이가 각 15센티미터인 정육면체로서 가운데 작은 동전 구멍이 있습니다. 얼핏 보면 저금통 같습니다. 색상은 블랙과 화이트 두 가지입니다.
저희가 개발하는 다른 발명품들처럼 사용법은 간단합니다. 잊고 싶은 기억을 마지막으로 떠올리며 동전 하나를 통 안에 넣기만 하면 됩니다. 물론 동전이 절단되는 건 아니고 머릿속 기억이 사라집니다. 블랙은 까맣게 잊히고 화이트는 하얗게 지워집니다.
짧은 숙려 시간도 있습니다. 넣은 동전은 1분 동안 망각도 아니고 기억도 아닌 중립 공간에 머물게 됩니다. 일종의 회심 기회인데 삭제 요청한 기억에 미련이 남는다면 곧바로 반환 버튼을 누를 수 있습니다. 기계 옆쪽 반환구로 동전이 튀어나오면 기억도 바로 돌아옵니다. 숙려 시간이 지났는데도 반환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면 1초 만에 기억이 삭제됩니다. 순삭이죠. 무엇을 세절했는지도 기억나지 않습니다.잘 절단된 기억은 다시 떠오르지 않습니다. 기껏해야 기시감(데자뷔) 정도죠.
과잉 기억의 시대
기억은 매우 이중적입니다. 행복의 수단이기도 하고 불행의 씨앗이 되기도 합니다. 인류 역사에 있어 판단력이 좋아진 것과 함께 기억량의 증가는 인간을 더 복잡한 존재로 만들었죠. 독버섯의 종류와 토끼 사냥법만 기억하면 되던 것이 원소기호와 태정태세문단세까지 암기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여자 친구의 생일은 물론 첫 데이트의 날짜와 장소도 기억해야 내 안위가 보장됩니다.
귀찮은 기억뿐만이 아닙니다. 떠올리기 싫은 기억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트라우마의 근원이 되는 나쁜 기억은 우리의 삶을 피폐하게 만듭니다. 자려고 누웠는데 밤새 생각이 지워지지 않습니다. 불면증과 우울증, 심지어 마약중독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인간의 머리가 폭발할 거라는 우려가 듭니다. 저희가 기억 말소용 세절기를 개발하게 된 취지입니다. 물론 요새 외장두뇌라고 불리는 스마트폰이 있어서 상당수의 기억을 분산시킬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이 또한 완벽하지는 않습니다. 저장했다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기 때문이죠. 우리에게정말 절실한 건 애초부터 존재했는지조차 모르는 상태에 이르는 완벽한 망각입니다.
당신의 망각 파트너
인간의 전두엽은 물리적인 공간입니다. PC 하드 디스크의 용량처럼 한계가 있죠. 저장 가능한 정보의 양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아무리 뛰어난 사람도 무한대는 아닙니다. 귀찮고 아픈 기억을 지운다는 건 다른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일 가능성을 키우는 일입니다.
상처만 남기고 떠난 전 남친의 이름과 연락처를 잊고 싶다고 칩시다. 저희 세절기를이용하면 간단합니다. 성공적으로 망각이 이뤄졌다면 떠올리려고 노력해도 안될 겁니다. 그렇게 기억이 지워져야 당신의 삶에 새로운 남자가 진입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 세절기로 절단할 수 없는 기억도 있습니다. 이해관계나 범죄와 관련된 겁니다. 내가 돈을 빌렸다는 사실을 잊고 싶다거나 범죄를 저지른 이력을 지우는 건 불가능합니다. (살인자의 망각법). 이 경우 동전이 자동으로 반환됩니다.
이 제품이 널리 사용된다면 사회적으로도 좋은 점이 많아질 겁니다. 기억을 많이 하는 것이 좋다는, 근거 없는 선입견이 사라질 겁니다. 잊을 권리의 신장과 함께 기억되고 싶은 욕구도 함께 낮아질 겁니다. 기념일을 기억하지 못해 부부가 다투는 일도 줄어듭니다. 기억해 줄 거라는 기대 자체도 낮아지기 때문이지요. 얼마나 평화로운 세상입니까?
평화를 위한 군비 감축
개인적인 마음의 평화든, 사회 갈등을 극복하고 얻는 평화든 과도한 기억이라는 무기를 줄여야 합니다. 복잡한 것, 잡다한 것이 대우받던 시대는 지났습니다. 더 가볍고 단출한 두뇌로 살아봅시다.
이 세절기로 동전을 모을 수도 있습니다. 나중에 세절기가 꽉 차면 기억의 흔적이었던 동전들이 적지 않은 목돈이 되기도 합니다. 나와 주위 사람을 괴롭히는 무기가 아니라 평화롭게 지내는 재원이 될 수 있습니다. 나쁜 기억을 지운 대가로 사랑하는 사람과 커피 한 잔 하세요. 뿌듯하지 않겠습니까?
아, 부작용을 안내해야겠군요. 아주 희박한 확률로 불완전 망각이 될 수 있습니다. 절단되다가 마는 것이죠. 연료의 불완전 연소가 호흡기에 치명적인 것처럼 이렇게 되면 황당한 증상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새 여친을 기억도 없는 전 여친의 이름으로 부른다든가, 공포에 떨게 했던 영화를 찾아본다든가, 엉망이라고 생각해 지운 글을 다시 쓴다거나... 엉망이라고 생각해 지운 '기억 말소용 고속 세절기'라는 제목의글을 다시 쓴다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