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그대로 그리움을 담는 냉장고입니다. 원래 냉장고는 음식의 부패를 막아주는 기계죠. 그런데 발효식품은 조금 다릅니다. 싱싱함을 죽이고 썩기 직전까지 가야 합니다. 김치, 요구르트, 홍탁, 젓갈, 치즈 등은 충분히 삭아야 맛있는 음식들입니다.
시중에 이미 많이 보급돼 있는 김치냉장고는 발효와 숙성을 위한 것입니다. 그리움 숙성 냉장고 역시 원재료인 기억의 싱싱함을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적당히 삭도록 돕는 가전제품입니다.
가령, 어떤 인물에 대한 당신의 기억이 있다고 합시다. 그 사람에 대한 생각이 고스란히 유지되도록 돕는 건 이 제품의 기능이 아닙니다. 그건 카메라와 영상 소프트웨어가 할 일이죠. 이 냉장고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기억의 화학적 변화를 이끌어냅니다.
작동법을 말씀드리죠.케이블을 연결하고 전원을 켜면 디스플레이에 기본 세팅을 위한 입력창이 뜹니다. 여기에 자주 사용하게 될 정보를 기본값으로 넣습니다.
1. 그리움의 종류 : 장소, 인물, 사건, 감각, 텍스트
2. 희망 숙성 정도 : welldone, medium, rare
3. 숙성 기간 : 1일, 1주일, 1개월
물론 이건 기본값이며 매번 바꿀 수 있습니다. 하지만 숙성이 완료되기 전에 중단하거나 전원을 꺼버리면 고장의 원인이 됩니다. 마치 먹다 남긴 항생제처럼 냉장고에 내성이 쌓이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그리움 소스에 대한 감도가 떨어져 오작동이 생길 수 있습니다. 사용시 주의하셔야 합니다.
아, 사용법은 간단합니다. 어떤 음료든 절반을 마시고 넣었다가 숙성이 끝나면 나머지를 마시면 됩니다.
그리움의 재발견
여기까지 읽으면 '도대체 저 제품은 뭐가 좋지?'라는 의문이 드실 겁니다. 일반적으로 그리움은 좋은 감정이 아니기 때문이죠. 그리움의 근원은 상실과 결핍입니다. 나에게 뭔가가 없다는 건 유쾌한 일은 아니죠.
'난 널 그리워해'라는 문장이 영어로는 I miss you, 프랑스어로는 Je te manque입니다. 놓쳤다, 잃었다는 뜻이죠. 상실감이 그리움의 밑바탕인 건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 둘의 뜻이 같다면 왜 다른 단어가 됐을까요? 그리움은 분명 상실감과는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움은 괴로움과도 다릅니다. 발음은 비슷하군요. 물론 그리움이 지나치면 괴롭기도 하지만 꼭 그런 건 아닙니다. 오히려 적당한 그리움이 삶의 에너지가 되기도 합니다. 없는 것 소망한다는 차원에서 그리움은 꿈과도 닮았습니다. 그러나 꿈은 미래의 일, 그리움은 과거 쪽을 향한다는 점에서 다릅니다.
이 냉장고의 목적은 그리움을 잘 가공해 삶의 에너지원으로 쓰게 해 드리는 것입니다. 뭔가를 추구하는 감정이나 행위는 그 자체로 에너지가 있습니다. 상황을 바꿀 힘이 생기는 것이죠. 음식에서 신체적 에너지를 얻는 것과 같습니다. 잘 관리된 그리움은 정신적, 정서적 열량이 됩니다.숙성이 끝난 후 마시게 되는 음료에서 이전의 그리움과는 차원이 다른 애틋함이 느껴질 겁니다.
삭힘의 미학
어떻게 하면 그리움이 최적화될까요? 우리는 삭다, 삭히다라는 동사에 주목했습니다. 사람의 행동이 아니라 시간의 작용입니다. 어떤 조건에서 일정한 시간의 경과가 만들어내는 변화인데 농도는 묽어지고 색은 탁해집니다. 재료의 숨이 죽는 겁니다. 냄새는 고약해지고 맛은 오묘해지죠.
익다, 익히다와는 어감이 다르죠.익으면 먹기 좋지만 삭은 건 잘 모르겠습니다. 무엇이 삭았나, 얼마나 삭았냐, 누가 먹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삭힘은 신선함의 반대쪽에 있고 부패와 가깝지만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많은 발효식품들이 우리 몸에 좋은 것처럼 삭힘은 이롭게 활용될 수 있는 감정 조리법입니다.
잘 삭은 그리움의 효능
우리는 역사상 가장 빠른 충족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무언가 누군가 어딘가를 그리워하기 전에 찾을 수 있습니다. 먹고 싶은 음식은 금세 도달해 초인종을 누릅니다. 떨어진 사람과는 영상통화로 만납니다. 다시 가고 싶은 곳도 누군가는 찍고 있는 실시간 영상으로 마주할 수 있습니다.
그리움의 실종 시대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원하는 것이 손안에, 머릿속에 빠르게 도착합니다. 도무지 그리워할 짬이 없는 겁니다. 이런 시대일수록 발효감정이 중요합니다. 패스트푸드가 각종 성인병을 일으킬 때 슬로 발효푸드가 주목받는 것과 비슷합니다.
예전보다 편해졌지만 예전만큼 행복하지 않다면 그리움 숙성 냉장고를 하나 장만하세요. 오래 생각하며 간절히 그리워하며 손꼽아 기다리며 품었던 설렘이 즉각 충족, 당장 만족보다 행복에 더 가까운 것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