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 분리배출 바구니

몸에 다녀간 나쁜 감정을 깔끔하게 내보내세요

by 이지완
제품 소개

편리하게 감정을 분류, 정리, 배출할 수 있는 바구니를 소개합니다. 등나무 가지를 엮어 만들었어요. 가로, 세로, 높이가 각각 5센티미터인 큐브상자 13개가 옹기종기 붙어 있습니다. 마치 꿀벌 집과 비슷하게 생겼지요. 바구니의 각 셀은 각기 다른 색으로 칠해져 있어요.

1. 빨강 : 다 쓴 열정, 번아웃 찌꺼기
2. 초록 : 대인관계 스트레스, 관계 강박
3. 분홍 : 업무 혹은 학습을 잘 해내지 못한 자책, 죄책
4. 노랑 : 뜻대로 안 된 일 때문에 생긴 조바심
5. 연두 : 형평과 공정 결여로 발생한 억울함
6. 갈색 : 타인의 언행이 유발한 께름칙함, 찜찜함
7. 파랑 : 훼손된 자존감, 모욕감
8. 살구 : 갈등 예방과 해결에 소모된 에너지
9. 검정 : 선택에 따른 기회비용 생각, 미련, 아쉬움
10. 보라 : 이유를 알 수 없는 짜증
11. 남색 : 귀찮음, 매너리즘, 부질없음
12. 주황 : 거절 공포, 거절당한 트라우마
13. 하양 : 납득하기 힘든 힐난과 비난에 대한 적개심


사용법은 매우 간단합니다. 13개의 셀 한복판에 작은 원통형 셀이 있어요. 여기에 몸에서 분비된 무언가를 넣으면 이모티고리즘이라는 소프트웨어가 작동하기 시작합니다. 이 제품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죠. 가령, 귀지를 넣었다고 치면 이 알고리즘은 당신 몸에 머물렀던 감정들을 파악합니다. 1분 이내에 최근 24시간을 지배했던 부정적인 감정 3개를 추출합니다.


물론 사람의 마음이 한두 개로 정리되는 것은 아니지만 가장 큰 비율대로 찾아냅니다. 중이온가속기와 비슷하게 강력한 자기장이 형성되지만 사이즈는 수억 분의 일에 불과하죠. 아주 간편하게 감정이 분류됩니다.


가령, 당신이 연인과 다퉈서 상처를 받았다고 해봅시다. 집에 돌아와 머리카락을 중앙 원통에 넣고 작동 버튼을 누르면 2, 7, 8번 셀이 활성화됩니다. 관계 강박과 자존감의 훼손, 갈등 봉합에 소진된 에너지 등입니다. 그러면 이모티고리즘이 머리카락에서 추출한 감정을 전기 신호로 만듭니다. 중앙의 원통은 13개의 다른 셀들과 연결돼 있는데 이는 인간의 두뇌와 비슷합니다. 수십 억 개의 돌기로 이루어진 뉴런들이 전기 신호화된 감정을 각 방으로 전달하죠. 이렇게 분리배출이 진행되는 것입니다.


내 생활에 봉사한 쓰레기에 대한 예의


이 제품을 출시하게 된 계기는 이렇습니다. 우리 아파트는 매주 수요일에 쓰레기 분리배출을 합니다. 종이, 고철캔, 플라스틱, 공병, 비닐봉지 등 삶의 찌꺼기들이 종류별로 모이죠. 일주일에 한 번이지만 매우 귀찮습니다. 낑낑대며 옮기는 것, 손에 이물질이 묻는 것, 투명 페트통에서 눌어붙은 라벨을 떼는 것 등 짜증지수 상승을 동반하는 가사노동입니다. 딱지가 말끔히 떨어지지 않으면 내 뱃속으로 들어갔던 모든 음료를 토해내고 싶은 심정이 들기도 합니다. 음식물 쓰레기의 국물과 냄새, 쓰레기봉투 옆구리 터짐과 함께 스트레스 유발 TOP 3입니다. 그러나 이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한주라도 분리배출을 놓친다면 집안은 난장판이 됩니다. 깔끔하고 말끔한 생활을 위해서 이 노동은 어쩔 수 없는 일이죠.


그런데 쓰레기만 그럴까요? 우리의 두뇌에 쌓이는 감정의 찌꺼기들도 독이 될 수 있습니다. 삶의 공간이 더러워지고 좁아지는 것과 비슷하게 감정들도 우리 심신을 황폐하게 만들 수 있죠. 그래서 감정 분리배출 바구니를 발명하게 된 것입니다.


내 몸에 다녀간 감정들이 깔끔히 정리된다면?


몸을 숙주로 하여 다녀가는 감정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기쁨, 슬픔, 즐거움, 서운함, 짜증, 보람, 뿌듯함, 괴로움, 낭패감, 우쭐함, 그리움, 억울함, 귀찮음, 성취감, 설렘, 분노, 질투, 민망함 등등. 개발 과정에서 모든 감정을 분리하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소비자들의 부정적인 감정을 내보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판단에서 13개의 카테고리로 줄였습니다.


우리에게는 감정을 조절할 능력이 있습니다. 동시에 감정에 휩싸이는 한계도 있죠. 회복탄력은 모두가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부정적인 감정에서 쉽게 빠져나오지만 어떤 이는 오래, 깊게 힘들어합니다.


만약 당신이 스스로 모든 부정적인 감정을 완벽히 통제할 수 있다면 이 발명품은 무용지물입니다. 하지만 어떤 감정에서 벗어나지 못해 힘들었던 경험이 있다면 이 바구니를 써보세요. 현명한 친구의 조언 이상의 효과가 있을 겁니다.


단, 이 바구니는 감정의 분류와 삭제에 도움을 주는 것이지, 나쁜 감정을 초래한 사건에 대한 기억을 지워주지는 않습니다. 또한 배출 완료 신호등이 켜졌다고 해서 그 감정이 오롯이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분리배출 결과가 당신의 신체에 영향을 주도록 설계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죠.


사용자는 이 과정을 지켜보며 자신의 감정을 객관화할 뿐입니다. 그게 무슨 소용이냐고요? 메타인지, 메타감지는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능력입니다. 이 바구니는 사용자가 그 능력을 발휘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자신의 몸에서 감정을 분리해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그럼으로써 마음의 공간을 청소하는 것입니다. 만약 처리 후의 결과를 바이탈 신호로 바꾸어 생체에 직접 영향을 준다면 당신은 사이보그가 됩니다. 고장 난 로봇을 고치는 것과 비슷하게 되죠. 이 점 숙지하여 제품 선택에 참고해 주십시오.


다음 주에는 그리움 숙성 냉장고를 소개하겠습니다. 우리가 몰랐던, 그리움이 주는 에너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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