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각오한 불행은 꼭 오고야 마는가?지금 나는 유리 피라미드 앞에서 루브르 박물관 입장을 위해 긴 줄을 서 있다. 지난 반나절 동안 겪었던 소소한 불행을 열거하자면 다음과 같다. 14시간 비행과 프랑크푸르트에서의 환승, 다시 2시간 비행 후 나는 비몽사몽의 상태로 샤를 드골 공항에 내렸다. 집중력이 저하됐는지 수화물 찾는 곳을 지나쳐 나와 버렸는데 다시 들어가는 건 어려웠다. 공항은 손님만 있는 무인 상점 같아서 물어볼 사람이 없었다. 겨우 만난 흑인 직원의 안내로(이분도 카트 정리 담당이지 안내원은 아니었다) 겨우 수화물 레인 쪽으로 돌아갔다. 다행히 수화물은 나오지 않은 상태였는데 불행히도 끝내 나오지 않았다. 기다림이 길어지고 뭔가 심상치 않은 느낌이 들었다. 한 무리의 프랑스인과 한국인들이 사태를 파악하느라 여기저기 쫓아다니며 영어, 불어, 한국어, 손짓발짓을 남발했다. 결국 인터넷 분실 신고 양식 종이 한 장을 받은 채 허탈하게 공항을 나와야 했다. 공황장애인지 공항장애인지가 얄밉게 윙크하는 것 같았다.
공항 주변 호텔을 돈다는 셔틀버스 정류장에도 친절은커녕 안내자도 없었다. 예약한 호텔이 듣보잡이었는지 물어보는 사람마다 모른다는 대답 뿐이었다. 하긴, 아무리 내국인이어도 여행객이 뭘 알겠는가? 인천공항에서 외국인이 송도 신도시의 싸구려 호텔을 어떻게 가는지 묻는다면 내가 해 줄 말이 있겠는가? 구글맵을 보니 5킬로 정도 떨어져 있었다. 몇몇이 택시를 권했다. 타고 싶지 않았다. 피곤과 암담이 몰려왔지만 처음부터 굴복하긴 싫었다. 돈 때문이라기보다는 택시는 왠지 실패의 상징 같았다. 내 숙소 근처에 있는 노마드 호텔 전용버스가 오길래 거기 투숙객인 척하며 소형 버스에 탔다. 뜨고 지는 비행기 소리만 들릴 뿐 깜깜한 외곽도로를 달리자 왠지 우울해졌다. 옷도, 음식도, 심지어 칫솔 치약도 없다. 번뇌만 남았다.
노마드(유랑자라니 내 신세잖아!) 투숙객 위장 전술은 다행히 성공이었는데 잠시 후 실패로 밝혀졌다. 구글의 안내에 따라 삼백 미터 정도 걷자(매우 으스스한 밤길이었다) 내 숙소인 지오그라프가 나왔다. 그런데 거의 동시에 셔틀버스가 도착하는 게 아닌가! 다리가 풀리는 순간은 고생이 깊은 때가 아니라 불필요한 헛수고를 깨닫는 때다! 어차피 올 버스를 모른 채로 다른 호텔 투숙객인 척과 불필요한 밤 산책을 한 셈이다. 키를 받아 방에 들어갔다. 일제강점기 시절의 고급 호텔 같았다. 욕실 물 트는 방법, 물비누 짜는 법을 몰라 헤맸다. 드라이기를 찾으려고 애썼는데 순간온수 보일러처럼 벽에 붙어있는 물체였다. 배가 고팠으나 분노와 피곤이 압도한 나머지 잠이 들었다. 무려 25시간 만의 수면이었다(날거나 걸으면서 잠깐씩 잔 것 빼고).
이 물건이 어딜 봐서 드라이어인가? 순간 온수기지.
몇 번 깼지만 그런대로 잘 잤다. 아침에 TV 뉴스를 보니 오늘도 파업을 한단다. 난 불운을 달고 여행 다닐 운명인가 봐. 호텔 조식을 먹으면서 보르도에서 온 커플과 대화하게 됐는데 내 불어가 답답했는지 점점 영어를 섞더니 나중엔 아예 영어로만 말했다. 내가 불어를 하면 대부분의 프랑스인들은 처음엔 기특함, 중간에 (알아들으려고) 노력함, 마지막에는 답답함의 감정을 겪는다. 수개월의 불어 회화 공부가 허탈해지는 순간이었다. 체크아웃 후에 셔틀버스(이번엔 제대로 탔다)로 공항 3 터미널로 갔다. 샤를 드골 장군이 지하에서 내 고생을 봤어야 했는데... 대중교통을 타려고 안내요원의 조언에 따라 5일 짜리 파리 비지테를 끊었다. 일종의 자유이용권인데 파리 시내 어디든 다 데려다 준다. 요금이 무려 12만 원이다(게다가 마그네틱 손상으로 1시간 후에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파리지엥 아니랄까 봐 이 녀석도 파업을 한다
RER이라는 외곽 철도를 타고 파리 북역에 도착했다. 구글이 새 숙소로 나를 끌고 갔다. 어라 금방이네 싶었는데 뭔가 이상했다. 예약이 없다길래 따져보니 동명이숙소였다. 세인트 크리스로퍼 인이 아니라 세인트 크리스토퍼 호스텔이란다. 쫓겨나 눈물을 참고 30분을 또 걸었다. 한비야 씨가 내 고생담을 책으로 써주면 좋겠다. 파리 밖으로 행군하라. 좋게 생각하자 다짐하며 걷는 길은 좋았다. 아침 운동을 하는 사람들, 운하 호수 위로 떠다니는 오리들, 상쾌한 소리를 선물하는 새들. 나만 비참했다. 양치도 못하고 갈아입을 옷도 없다. 기내에 가지고 탄 가글용액 한 통이 내 불쾌감을 치유하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여행의 추억은 해프닝에 비례한다는 말을 취소하고 싶다.
파리에도 벚꽃이 피었다
체크인 시간이 아닌 건 알았지만 짐이 오면 맡아달라고 부탁해 놓고 나왔다. 지하철 7호선을 타려는데 자유이용권이 말썽이었다. 역시 역무원은 없고 인터폰으로 통화하는데 해결은 안 된다. 지나가던 의협심 강하고 잘 생긴 청년이 무임승차를 시켜줬다. 너 티켓 있는 거니까 괜찮아,라며... 첫날부터 다사다난하다.
루브르에 대해서는 아무 말 않겠다.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는 반나절이었다고만 해두자. 기다리면서 지루함(무려 2시간 대기)을 못 이겨 대화를 나눈 독일 커플이 나를 재밌게 해줬다. 스탠드업 코미디언이라는 필립과 교사 준비생 카트리나였다. 이런저런 잡담을 한 시간 넘게 했다. 너네는 통일돼서 좋겠다고 했더니 여자애가 어깨를 으쓱했다. 동의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나도 소원까진 아니랍니다). 오랜 기다림 끝에 만난 루브르에서 가장 감동적이었던 것은, 바로 이 순간.
1789년 혁명을 다룬 그림 앞에서 아이들이 너도나도 발언하려고 손 들고 있다
진짜 교육은 저런 것이지 싶었다. 나처럼 수학여행 온 아이들 이었는데 예술과 역사 학습 재료가 널려 있는 것이다! 평생 한 번일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나는 지칠 때까지 도는데 쟤네들은 일 년에 한 전시관씩, 여러 번을 오겠지? 얼마나 좋을까. 참기 힘든 부러움이 지친 내 몸과 (소매치기 안 당하려고 잔뜩)긴장한 마음을 덮었다. 수천 년 지구 위 많은 곳의 역사가 예술로 남겨져 배움과 감동의 소재가 된다니, 미래세대가 저렇게도 적극적으로 공부하다니 충격이 신선했다. 실체 없이 암기로만 배웠던 내가 억울했다. 우리는 미술 책으로만 피카소를, 역사책으로만 갑오개혁을 배웠다. 감동이 아니라 암기로만 평가받으며 배웠다. 그게 과연 배움이었을까? 단순히 진학과 취업의 수단이었을까?